산업 산업일반

[대한민국, 새로운 도전의 시대] (2부-2) 문화

골리앗과의 싸움… 문화주권 '위태'



뮤지컬 마니아인 대학생 나하나(21)양. 자신의 블로그에 국내외 유명 뮤지컬 공연 자료를 올리는 게 중요 일과 중 하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블로그에 올라온 댓글들을 보며 흐뭇해 하던 그녀. 어느날 블로그 공개 게시판에 올라 있는 경고 메시지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귀하께서는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공연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고소 조치를 취할 것이니 즉시 사진과 동영상을 삭제하기 바랍니다.’ 몇 달 전 보았던 미국 디즈니 뮤지컬 ‘라이온 킹’의 공연 사진을 무심결에 블로그에 올린 게 화근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위해 냉수 한잔을 찾아 부엌으로 향했던 그녀는 식탁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버지와 오빠 모습을 보고 더욱 심란해졌다. 소규모 출판사 사장인 그녀의 아버지(58). 헤밍웨이 등 저작권이 만료될 것으로 예상됐던 세계 유명 작가들의 소설 전집을 낼 계획이었지만 저작권 보호 기간이 연장되는 바람에 비용 부담을 무릅쓰고 출판을 강행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IT 벤처기업 디자이너인 오빠(31)는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이용한 MP3 재생기를 내놓으려 했지만 고액의 저작권료 탓에 결국 새 캐릭터를 개발해 신제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소비자들은 그가 만든 캐릭터 악어 ‘앨리’ 대신 유명 캐릭터 ‘키티’를 담은 제품을 골랐다. 아버지와 오빠의 풀 죽은 모습에 우울해진 그녀는 기분을 달래려 TV를 켠다. 요즘 한창 안방극장을 주름잡는 미국 드라마 ‘아일랜드’를 보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직후 미래 한 가정의 모습을 그려본 가상현실이다. 한미 FTA가 우리 문화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한미 FTA 체결로 문화산업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분야는 지적재산권 시장과 방송ㆍ영화 등. 저작권 보호 기간이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 출판사들은 로열티 부담을 20년간 더 짊어지게 됐다. 저작권 위반자 신상정보 제공 등으로 인터넷 사용 환경도 크게 변한다. 방송은 외국인 간접투자가 전면 개방되면서 경쟁이 더욱 거세졌고 국내 영화계는 지난해 7월부터 73일로 줄어든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가 확정되면서 얇아진 성벽에 의지해 할리우드 거대 제작사와 싸워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지적재산권=한미 FTA 협상 때 문화 분야에서 영화 스크린쿼터와 함께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저작권 보호기간이었다. 세계 7위 규모의 거대 도서 시장인 국내 출판계는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으로 적지않은 후유증을 앓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체 출판 종수 가운데 해외 번역서 비중이 각각 5%, 8%에 불과한 미국과 일본에 비해 국내 출판계는 전체 종수의 29%가량을 번역도서가 차지할 정도로 해외 저작물 의존도가 높다. 이번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으로 상대적으로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저작권법학회 자료에 따르면 저작권 보호기간 20년 연장에 따른 추가 부담액은 2,111억원. 이중 출판 분야 비용은 679억원(연간 34억원) 수준이고 미국 저작자에게 돌아가는 저작권료는 20년간 81억원(연간 4억원) 정도로 분석된다. 정부는 이 추가 부담액이 새로 발생하는 비용은 아니기 때문에 피해 규모가 크지 않다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출판계는 적어도 연간 200억원의 저작권료 부담이 생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캐릭터 시장도 타격이 크다. 저작권 보호기간 20년 연장에 따른 추가 부담액 2,111억원 가운데 67%인 1,407억원이 캐릭터 산업에서 지불해야 할 돈이다. 미국에 고액의 로열티를 주고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들여와 각종 상품을 팔던 중소 기업들은 저작권료 부담을 계속 안아야만 한다. 인터넷 등 온라인 시장 변화의 파도도 거세진다. 저작권자가 요청하면 네이버ㆍ다음 등 국내 포털사이트들은 저작권 침해자의 개인정보를 저작권자에게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무심결에 블로그에 올린 동영상이나 사진과 파일 복제로 인해 고액의 배상금을 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또한 전원을 끄면 데이터가 지워지는 램(RAM) 등 일시적 저장 콘텐츠에도 저작권을 인정했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의 암호와 ID 등 통제기술을 훼손하는 것도 저작권 위반 행위로 규정해 인터넷 저작권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일 전망이다. 저작권자에게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조항 등은 벌써부터 개인 사생활 침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한미 FTA 타결로 인해 스크린쿼터가 향후 조정 가능한 ‘미래유보’에서 조정 불가능한 ‘현재유보’로 바뀜에 따라 영화계는 든든한 방어벽 없이 할리우드 거대 자본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영화계는 당장 시장점유율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면서도 스크린쿼터 축소와 현재유보 결정이 향후 2~3년 안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한다. 이승재 LJ필름 대표는 “최근 국내 영화산업의 부진은 자본시장 위축 등으로 인한 구조적 위기이지만 앞으로는 스크린쿼터 등 보호장치 부재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한 위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인들은 이번 FTA 타결로 예술영화나 실험성 높은 영화가 제작되거나 극장에서 상영될 기회 자체가 줄어 영화 전체의 다양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더 큰 문제는 아직은 이런 위기상황을 돌파할 만큼 한국영화 체질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 차승재 영화제작가 협회장은 “일본 수출시장 붕괴로 시장 크기는 현격히 줄어들었는데 제작비는 오히려 늘었다”면서 “지금은 한국영화의 성장이 둔화된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등 여러 악재가 동시에 겹친 위기상황”이라고 말했다. ◇방송=간접투자가 100% 허용돼 CNNㆍCNBC 등 뉴스 채널은 못 들어오지만 HBOㆍFOXㆍ타임워너ㆍ디즈니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거대 미디어 그룹들이 직접 국내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 간접투자 방식으로나마 100% 시장이 열리게 됨에 따라 국내 PP들은 해외 채널들과 직접 경쟁에 나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영화ㆍ애니메이션ㆍ스포츠 등이 우선적으로 경쟁해야 할 부분으로 꼽힌다. 특히 온미디어ㆍCJ미디어 등 국내 메이저 복수채널사업자(MPP)들과 MBC ESPN 등 스포츠 채널이 주로 미국 콘텐츠 수입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워왔기 때문에 미국에서 직접 채널이 들어오면 타격은 예상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 온미디어ㆍCJ미디어 같은 거대 MPP들은 시장 개방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수익을 챙길 것으로 예측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 심화될 수 있다. 인터넷 프로토콜 TV(IPTV) 등 다채로운 방송 플랫폼이 등장하면 핵심 채널을 보유한 이들 MPP의 몸값은 더 뛸 것이라는 것. 국내 유료방송 시장 파이가 미국 미디어 자본이 탐낼 만큼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방송시장은 지상파와 SO를 포함해 총 6조원 규모로 미국(약 117조원)의 5%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국내 MPP회사의 한 관계자는 “국내 방송시장은 광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데 이미 해외 콘텐츠와의 경쟁력에서 앞선 지상파와 대기업 MPP가 장악한 광고 시장에 외국 채널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출판업계 - "체질개선" 목소리는 높지만… 3조8,000억원. 국내 문화산업 중 최대 시장 규모를 지닌 출판업계는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박맹호, 민음사 대표, 이하 출협)와 출판인회의(회장 이정원, 들녁출판 대표)를 중심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대책마련에 본격 돌입했다. 이들은 이미 EUㆍ호주 등에서 저작권 보호기간 70년을 대세로 받아들이고 국내 출판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분위기다. 이정원 회장은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은 국제적인 추세로 이해하고 있다"며 "꾸준하게 준비해온 국내 출판업계의 체질개선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계는 학습지ㆍ단행본ㆍ교재 부문 대표들로 구성된 저작권대책위원회(위원장 강희일, 다산출판 대표)를 출협 산하에 결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위원회는 우선 ▦외국 저작물의 연도별 현황 파악 ▦국내외 저자의 인명록 제작 등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저작권법 개정시 출판권 보강 등을 정부에 요청할 계획이다. 또 정부가 발표한 '출판지식 산업 육성방안'과 이를 위한 1,600억원 예산 지원이 실행되기까지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방침이다. 강희일 위원장은 "현재 정부가 내놓은 출판산업 진흥방안은 계획에 불과한 상태"라며 "출판업계가 나서서 예산을 확보하는 물론 확보된 예산이 바람직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대책도 내놓았다. 출판인회의가 운영하는 서울북인스티튜트(SBI)는 가장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 지난 2005년 2월 출범 후 현재까지 12개 과정 1,300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올해는 취업전문 특별과정인 서울출판예비학교 사업을 강화해 전문인력을 공급할 계획이다. 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영률 커뮤니케이션북스 대표는 "정보혁명과 평생교육의 일반화 등으로 새로운 콘텐츠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며 "변화하는 매체와 시장환경에 맞는 원천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산업이 바로 출판인 만큼 FTA 체결로 인한 출판산업 쇠퇴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디지털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유통구조 개선에도 나서겠다고 밝혔다. 도서정가제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관련 법을 개정하고 출판계에서 자행됐던 '사재기'도 근절하겠다는 것. 이 회장은 "사재기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 독자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어 더 이상 출판윤리에만 맡겨둘 수 없는 실정"이라며 "사재기 행위가 적발되면 즉시 공표하고 검찰에서 직접 조사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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