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6월9일 밤10시, 돈을 바꾼다는 뉴스가 국민들의 귀를 때렸다. 10일 0시를 기준으로 단행된 긴급통화조치의 골자는 원화 도입. 영국에서 찍어온 새 돈 원화는 환화와 1대10의 비율로 교환됐다. 환화는 통용이 허용된 10환 이하의 소액권과 주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못 쓰는 돈이 돼버렸다. 군사정부는 시한인 17일까지 신고된 옛 돈을 전액 바꿔주지 않고 일부만 내준 채 나머지는 은행 강제예금으로 묶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비민주적ㆍ반시장적 조치였지만 정부는 밀어붙였다. 명분은 악성 인플레이션 차단과 음성자금의 산업자금화. 고소득층의 은닉재산을 찾아내 경제개발에 활용한다는 의도였다. 통화개혁은 의도와 달리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예금동결로 시중에 돈이 돌지 않은 탓이다. 6월14일 48.5%를 기록했던 중소기업 가동률이 월말에는 38%선으로 떨어졌다. 치솟는 물가는 서민생활을 압박했다.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던 개혁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부작용에 군사정부는 7월13일 예금동결을 풀었다. 33일 만에 실패를 자인한 셈이다. 한국은행은 물론 재무부도 배제된 채 몇몇 군 장성을 중심으로 추진된 화폐개혁이 남긴 상처는 오래 갔다. 사전에 통고받지 못한 미국 측의 불만으로 한미관계도 불편해졌다. 1963년 12월21일자 서울경제는 화폐개혁을 ‘경제위기를 초래한 최대 실정’으로 꼽았다. 1950년과 1953년에 이어 세번째 화폐개혁인 1962년의 통화조치는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내자동원의 한계를 절감한 정부는 정책의 중심을 외자도입, 보세가공무역 육성으로 돌렸다. 3차 통화조치는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화의 리디노미네이션이 논의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1962년의 실패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