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꽃'의 시인 김춘수 씨의 삶과 예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의 `꽃' 전문) 한국시단의 원로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시인이 `꽃'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시로 꼽히는 `꽃'은 시전문지 `시인세계'가 최근 실시한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 설문조사에서 1위에 오른 바 있다.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김 시인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에 이어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단장' `쉰한 편의 비가' 등 시선집을 포함해 모두 25권의 시집을발표했다.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꽃'을 소재로 한 초기시부터,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면에 감춰진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무의미시'에 이르기까지60년 가까이 한국시단에서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위상을 지켜왔다. 그의 문학세계를 총정리한 `김춘수 전집'(현대문학ㆍ전5권)이 지난 2월 출간됐다. 전집 출간 직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만난 김 시인은 대표시 `꽃'에 대해 "언젠가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시의 1위로 뽑힌 걸 보면 일반인들은 이 시를 연애시로받아들이는 것 같다"면서 "사실 이 시는 언어문제와 실존문제에 대해 쓴 철학적인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꽃의 소묘'로 대표되는 초기 관념시에서 `무의미시'로 일컬어지는 `처용단장' 등 중기시,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형성된 `쉰한 편의 비가' 등 후기시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시인이 평생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무의미시'를 썼던 것은 일제시대 겪은 개인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전집 출간을 계기로 만났던 그는 "일제에 저항하거나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니혼(日本)대학 유학시절인 일제말기에 옥살이를 했고 이로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고 숨은 사연을 공개했다. 경남 통영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일본 유학시절, 이웃에 살던 한국인 고학생들을 따라 도쿄 인근의 가와사키 항구에 하역작업을 하러 몇 차례 간 적이 있었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휴식시간에 한국인 7-8명이 모여 일본 천황이나 총독정치 등에 대해 한국말로비판한 것이 문제가 됐다.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헌병보로 일하던 한국인 유학생이그 자리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7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퇴학을 맞았으며,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불령선인의 딱지가 붙은 채 살았다. 그는 연작시 `처용단장'을 통해 당시 수감 경험 등을 일부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일제말기 냉수탕 고문이 두려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자신을 보며 기질적으로 항일운동 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많이 좌절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함께수감돼 있던 일본의 유명한 좌파 교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혼자 먹는 것을보고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는 "사상가(관념가)와 실천가는 다르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관념을 배제한 `무의미시'들은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됐다"면서 "내 또래의 윤동주 시인도 독립운동을 맹렬히 했다기보다 나처럼 우연히 고역을 치르다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제말의 수감 경험이나 5공 때 전국구 의원이 된 것은 모두 내 의지가 아니었던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김 시인은 5년전 부인과 사별한 뒤 경기도 분당에 사는 큰딸 영희(59) 씨의 아파트 근처에 살았다. 직장에 다니는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살았던 그는 지난 8월 4일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시작(詩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전집 발간 이후써온 시를 엮은 신작시집 `달맞이꽃'이 12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그의 대표적 산문으로 엮은 단행본도 함께 출간된다. 그는 투병중이던 지난 11일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상금 3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전액 내놓아 각박한 세상에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큰딸 영희 씨는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런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면서 "평소 입버릇처럼 광주 공원묘지의 친정어머니(부인)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된다//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나는 한밤내 운다.//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탑을 흔들다가/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 전문)라는 영혼의 울림을 지상에 남기고 그는 `하늘의 꽃밭'으로 떠났다.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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