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의 발전은 연금술사의 공이 크다. 철이나 구리 등 값싼 금속으로 값비싼 금을 만드는 연금술은 수많은 과학자를 자극했다. 오늘날에도 연금술사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물론 값싼 금속으로 금을 만드는 고대의 연금술은 아니다. 대신 플라스틱으로 금속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다. 바로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이다. 미국인 하야트 형제는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장뇌(녹나무를 증류하면 나오는 고체 성분)를 섞어 천연수지를 만들었는데 이게 최초의 플라스틱이었다. 그 뒤 석유로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양한 플라스틱이 개발됐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금속 성질의 플라스틱을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지난 77년에는 일본 도쿄기술연구소의 시라카와 박사팀은 화학실험 중 반응촉매를 1,000배나 넣는 실수를 했다. 뜻밖에도 반응용액의 표면에 찬란한 은색 광택의 고분자 박막이 생겼다. 시라카와 박사팀이 찾던 순수한 트랜스(trans) 형태의 '폴리아세틸렌'이 만들어진 것이다. 폴리아세틸렌은 오래 전부터 과학자들 사이에 전기 전도성을 지닐 가능성이 높은 물질로 지목돼왔다. 전기가 흐른다는 것은 물체에 전자를 전달하는 '캐리어'(carrier)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시라카와 교수 등이 개발한 플라스틱은 '전도성 고분자'이긴 하지만 금속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전도성 고분자에 전기가 흐르는 메커니즘에 대한 논란은 30년 넘게 야기돼 이를 응용하려는 학자들에게 걸림돌로 작용돼 왔다. 이때 한국인 과학자가 명쾌한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이광희 부산대 교수팀과 이석현 아주대 교수팀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물에서 고분자를 합성하는 기존 방법 대신 물과 기름을 함께 섞어 합성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폴리아닐린'이란 전도성 고분자를 개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폴리아닐린은 폴리아세틸렌보다 월등히 높은 전기전도도를 보였다. 또 전도성 고분자로는 최초로 온도가 낮아짐에 따라 전기저항도 낮아지는 금속의 특성을 보여줬다. 이제 머지않아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의 개발로 그 동안 금속으로 만들었던 모든 전기ㆍ전자 기기들을 대체할 수 있게 됐다. 플라스틱은 가볍고, 외부충격에도 강하며, 마음대로 성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음대로 휘어지는 플라스틱 디스플레이, 속까지 다 비치는 진정한 투명 전자제품, 기존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무게의 전자파 차단장치 등 그 활용은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