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일] 레콩퀴스타

1492년 1월2일 스페인에 경사가 났다. 무어인들의 그라나다왕국을 내쫓은 것. 711년부터 시작된 이슬람교도의 이베리아반도 지배도 끝났다. 로마 교황은 실지회복(Reconquista)의 대업을 완성한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 부부왕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스페인도 황금시대를 맞는다. 콜롬부스탐험대의 후원자로도 유명한 이사벨 여왕의 스페인에는 신대륙의 보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십자군원정을 떠나면서도 손대지 못하던 등위의 이슬람왕국을 처리한 스페인의 무력과 재력 앞에 유럽은 몸을 낮췄다. 이사벨의 손자인 펠리페 2세 때 스페인의 영광은 절정에 올랐다. 무적함대 아르마다로 상징되는 스페인의 패권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과 귀족의 사치는 신대륙의 금으로도 모자랐다. 식민지에 제품을 팔기 위한 변변한 생산시설도 없었다. 레콩퀴스타 직후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을 축출했기 때문. 학문과 고리대금업은 물론 가내수공업ㆍ농업에 종사하던 유대인과 아랍인 추방은 백성들의 환호성을 샀지만 국내 생산기반을 무너뜨렸다. 만성적인 적자에 빠진 스페인은 세금 짜내기에 나섰다. 결과는 네덜란드의 독립. 노른자위를 잃은 스페인은 쇠락의 길로 빠졌다. 레콩퀴스타 이후 유대인 자본과 인력은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로ㆍ영국으로 이동하면 각국의 흥망성쇠를 가르는 데 영향을 미쳤다. 비교생산비설을 내놓은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도 역시 같은 코스를 거쳐 영국에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이다.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 금융인력과 아랍인 기술자와 농부들을 추방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레콩퀴스타는 경제적 하부구조를 수반하지 않는 정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말해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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