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28일] <1227> 무솔리니. 로마진군


1922년 10월28일, 이탈리아 국무회의. 찬바람이 돌았다. 쿠데타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정변을 일으킨 자는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의 사병(私兵) 조직인 ‘검은 셔츠단’ 4만여명이 로마를 겹겹이 에워쌌다. 이탈리아 정부는 쿠데타군을 진압할 정부군을 동원하기 위해 계엄령을 결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국왕 에마누엘레 3세가 거부한 탓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국 구도는 살얼음판. 1921년 총선에서 최다득표를 한 보수당(139석)과 제2당인 사회당(127석) 이외에도 인민당(107석)과 기독교민주당(68석) 간 합종연횡 구도 속에서 국왕은 캐스팅보트를 바랐다. 정쟁과 파업의 틈바구니에서 정국 주도권을 노린 국왕과 의회가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의석수 36석에 불과한 파시스트당이 일으킨 쿠데타는 성공을 거뒀다. 국왕은 검은 셔츠단의 입성 하루 뒤 무솔리니를 수상에 지명, 쿠데타 편에 섰다. 이탈리아는 이후 2차대전 패망까지 몰락의 길을 달렸다. 한줌밖에 안 되는 의석을 가진 정당이 일으킨 정변이 성공한 원인은 오로지 국왕의 그릇된 판단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국제 자본이 무솔리니를 도왔다. JP모건 등 미국계 자본은 무솔리니를 ‘빨갱이의 파업에서 이탈리아를 구할 애국자’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금융자본의 대출은 이탈리아가 독일과 동맹을 맺을 때까지 이어졌다. 정작 무솔리니를 등장시킨 주역은 이탈리아 국민 자신들이다.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독재자에 현혹 당한 이탈리아는 결국 2차대전의 축에 서고 전범국가에 속하는 말로를 맞았다. 무엇이 자존심 강한 이탈리아인을 전체주의 깃발로 내몰았을까. 두가지다. 1차대전의 승전국이면서도 얻은 게 없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그로부터 파생된 ‘광기’.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