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원칙론자’다. 정치적 고비마다 유불리보다는 원칙을 앞세워왔다. 이런 성향을 따른다면 ‘삼성 비자금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되기 전 청와대의 입장도 그랬다. ‘삼성 특검법’이 특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했고 논리적으로도 타당했다. “국가 신인도 하락 등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청와대 관계자)”는 지적도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임기를 90여일 남긴 지금, 노 대통령으로선 ‘원칙’만을 따질 게재가 아니다. 오히려 원칙보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특검법 국회 통과 후 “거부권을 검토한다고 했지, 행사한다고 하지 않았다. 국회에 압력을 넣기 위해서였다”고 한걸음 물러난 것도 현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생각하는 ‘현실’은 무엇일까. 하나는 거부권을 행사해봐야 돌아올 결과가 뻔하다는 것이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국회의 재의결 요건은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2 찬성’인데 범여권까지 찬성한 마당에 재의결될 것이 확실하고 이 경우 득은 없이 국회와의 관계 악화는 물론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폭로를 계기로 떠돌고 있는 ‘청와대, 삼성 비호설’만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합천 해인사의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해 “당선 축하금을 받지 않았다. 특검을 하든 아니하든 흑백은 밝혀지도록 돼 있다”고 언급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벌써부터 노 대통령이 대세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당장 민주노동당에선 “특검을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다”며 공세의 고삐를 죄고 나섰다. 청와대 관계자가 25일 “‘특검을 수용하되 (특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나올 수도 있다”고 전한 것도 같은 줄기이고 현 기류라면 이쪽으로 결론 날 확률이 높다. 일부에선 “뭘 덮어 버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는 해인사 발언을 놓고 특검법과 BBK 문제를 연결시키는 ‘전략적 선택’을 취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만 놓고 노 대통령이 특검을 무조건 수용할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이르다. 또 다른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노 대통령의 퇴임 후 행보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특검법이 공포되면 차기 정권 들어서 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줄줄이 수사 대상이 되고 이는 내년 총선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원칙’과 ‘두 갈래의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노 대통령이 27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어떤 식의 방향성을 제시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