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사가 이젠 할 일이 없다구요? 종합상사가 없으면 중소기업 수출은 누가 합니까. 시대적 상황이 변했지만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종합상사의 역할은 무궁무진합니다.”
최형진 ㈜쌍용 기획담당 상무는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종합상사 무용론`에 대해 이같이 반박했다. 종합상사의 부실이 많고 기능이 예전에 비해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한국 경제의 버팀목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신시장 개척이나 해외네트워크를 활용한 기업활동에서 종합상사를 대체할 만한 조직은 없다. 종합상사 탄생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구축된 해외 네트워크는 종합상사만의 자산이다. 또 제품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해외 곳곳을 누벼온 상사맨들은 국내, 나아가 세계 최강의 영업사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살리자=대우인터내셔널의 한 임원은 “대우그룹이 해체됐는데도 왜 많은 계열사들이 `대우`라는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겠느냐?”고 되물으며 “브랜드 가치만 해도 수천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지난해 GM대우차로부터 `대우`브랜드를 사용하는 대가로 359억원을 받기로 했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인 데에는 다른 계열사들도 적지않게 기여했지만, 종합상사로 세계 곳곳에 대우 이름을 뿌려놓은 ㈜대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삼성이나 현대, LG, SK, 쌍용, 효성 등 어느 하나 빼놓기 아까울 정도로 이들 브랜드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세계인에게 알려져 있다. 이는 뭐니뭐니해도 각 그룹들을 대표해 해외에서 활약한 상사맨들의 발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 가장 적극적으로 뛰었던 삼성물산, ㈜대우 등은 해외지사를 100개 가까이 운용하기도 했으며, 주재원만 200~3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국ㆍ유럽ㆍ동남아 등 주요 수출시장은 물론 중남미와 아프리카 오지 곳곳에서 영업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고 자체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종합상사의 해외 네트워크는 최근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지난해 6월 현재 삼성물산은 68개, 대우인터내셔널은 57개, LG상사는 45개, SK글로벌은 43개, 현대종합상사는 39개에 불과하다.
LG상사의 한 임원은 “종합상사의 글로벌 네트워크야 말로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엔진”이라며 “종합상사가 어떤 형태로든 존속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엔진을 재가동할 시간이 필요하다=일부 종합상사들이 부실을 털어내고 재도약을 위한 고삐를 죄고 있는 반면, 몇몇은 여전히 수십년동안 쌓인 부실에 눌려 종합상사라는 간판을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종합상사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누적된 부실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종합상사 가운데 그나마 발빠르게 대응, 자체 힘으로 부실을 정리한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는 “종합상사들이 부실을 청산하지 못한 경우는 대부분 종합상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룹 차원의 문제 때문이었다”며 “어찌됐든 종합상사가 그동안 축적해온 자산을 잃지 않도록 다각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자본잠식 상태인 현대종합상사의 B임원은 “세상은 바뀌었고, 종합상사도 변화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상속된 부실은 너무 많고 한꺼번에 해결하기에도 벅차다”고 토로했다.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안정될 때 까지만이라도 부실해소를 유예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LG상사의 다른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종합상사들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왔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도 겪었다”며 “이제 방향을 잡아가고 있으며 머지 않아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근간으로 하는 종합상사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트워크 이용 사례] `오거나이징 능력` 십분 발휘
종합상사가 경영노하우와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성공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대우인터내셔널이 지난해 인도네시아 PGN사에 5만톤의 가스 운송용 파이프를 공급한 것은 종합상사이기에 가능했던 대표적인 사례다.
대우는 PGN사에 파이프를 수출하기 위해 공급처를 찾았으나 바이어가 원하는 기간내에 국내에서 물량을 모두 확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철강팀 대책회의에서 `포스코의 후판을 우선 확보해 인도네시아 현지 파이프 공장에서 가공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자카르타지사는 현지 파이프 공장을 신속하게 물색해 SEAPI사를 가공업체로 선정했고, 본사 철강팀은 포스코의 후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대우인터내셔널 관계자는 “짧은 기간 내에 파이프를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외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오거나이징 능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물산이 지난 97년 인수한 루마니아의 국영 스테인레스공장 오텔리녹스(Otelinox)도 성공 사례로 꼽힌다. 지난 97년말 삼성물산이 오텔리녹스의 지분 가운데 69.35%를 인수할 당시만 해도 이 공장의 세전이익은 50만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4년만인 2001년에 680만달러의 세전이익을 올린데 이어 올해는 700만달러의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같은 성공적 결과 뒤에는 종합상사만의 강점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물산은 오텔리녹스의 주력 생산품을 스테인레스 판재로 바꾸고 경영혁신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삼성물산 독일법인이 판매를 총괄하고 해외지사를 통해 판매지역을 크게 확대해 일감을 2배로 늘렸다.
최부천 오텔리녹스 공장장은 “루마니아 내수시장이나 인근 국가를 중심으로 판매하던 것을 인수 후에 유럽은 물론 아시아, 중동 등 세계 곳곳에 수출하기 시작했다”며 “해외네트워크를 통해 단기간내에 판매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종합상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종합상사 발전 방향] 새 성장엔진 찾아라
브랜드 마케팅ㆍ소프트웨어 수출입등
“종합상사의 마지막 승부는 정보기술(IT) 산업에서 결정된다. 몇 년 동안은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를 이겨내고 새로운 성장산업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삼성물산에서 20여년을 근무하며 종합상사의 인터넷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금룡 이니시스 사장은 “종합상사가 어렵게 된 것은 IT산업의 발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이 사장은 “종합상사가 성장하려면 성장산업에서도 한발 앞서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주와 경영진이 종합상사가 가진 자산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하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하드웨어 수출에 머물고 있는 종합상사는 그보다 더 큰 시장인 소프트웨어의 수출입, 해외컨설팅 등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회마저 놓치면 종합상사의 해외사업 기능은 점점 위축되고 주력사업은 건설ㆍ패션ㆍ유통 등 다른 사업으로 바뀌어 종합상사의 아까운 자산마저 잃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종합상사들은 각각 다른 상황에 처해있고, 생존과 재도약을 위한 방향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종합상사가 공통적으로 가진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각 사 경영진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
박원진 현대종합상사 사장은 “지난해 뛰어든 패션사업 등 내수유통사업이 1~2년 후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것”이라며 “현대자동차가 직접 수출하지 못하는 지역에 대한 수출과 무신용장을 통한 거래는 여전히 종합상사의 몫”이라고 말했다.
해외네트워크를 활용해 경쟁력 있는 거래선을 확보할 수 있는 종합상사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 국내 수입유통 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경쟁력 있는 분야에서 상사의 시장개척활동을 병행하겠다는 것이다.
종합상사들은 브랜드 마케팅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삼성물산이 미국법인을 통해 투자한 패션 브랜드 `후부(FUBU)`가 미국은 물론 세계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우인터내셔널도 중소기업으로부터 가전제품을 공급받아 `대우`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으며, 현대종합상사도 엔진오일 등에 자사의 상표를 수출해 지난해 400만달러 정도를 벌어들였다.
종합상사가 해외공장을 조인트벤처로 경영하는 것도 새로운 수익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영이 어려운 외국회사를 인수해 상사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상품을 수출, 성공을 거둔 사례들이 삼성물산의 오텔리녹스 사업 등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정우택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은 “종합상사의 수익구조를 고도화 시키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며 “기존의 수익성 있는 주력사업을 지속하면서 브랜드사업, 위탁경영사업, 프로젝트 오거나이징, 물류서비스, 해외조달 등의 신사업을 병행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종합상사에서 잔뼈가 굵은 경영진들의 공통된 지적은 `상사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사들이 처해진 상황에서 내실위주의 경영을 펼치되 상사맨들의 도전정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적절한 보폭을 유지하는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조영주기자 yjch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