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제위원끼리 시험 보고 채점하고 상까지 주고받는데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겠습니까. 정부 연구개발(R&D) 과제는 멤버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과제를 따기 위해 이너 서클에 들어가려고 작업하다가 포기한 기업들도 많습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정부 R&D 과제 밑단에 얽혀 있는 커넥션에 대해 "업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이야기"라며 "갈수록 촘촘하고 은밀해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정부는 매년 R&D 예산 늘리기에 골몰한다. 2009년 12조 원에서 2015년 18조8,245억 원으로 늘렸다. R&D 성공률도 97%나 되지만, 누구도 R&D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실과 부정, 비리가 끊이지 않는다. 원인에 대해 진단과 처방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될 뿐이다.
이번에 김진태 국회의원이 'R&D 기획자와 수행자의 관계분석'을 통해 소문으로만 떠돌던 검은 커넥션의 실체를 숫자로 보여줬다. 결국 기획자와 수행자의 유착관계를 끊지 않고는 R&D의 성공도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김 의원은 "국가 R&D의 부실이 개별 사건이나 몇몇 인물만의 문제로 지적됐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R&D 과제기획부터 수행까지 검은 커넥션으로 꽉 짜여 있다는 점"이라며 "온몸에 암처럼 퍼져있는 유착관계를 바로잡지 않고는 R&D 비리와 질적 저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 자료에는 정부 R&D 과제가 몇몇 연구원들의 유착에 의해 결정되고 수행자가 낙점됐다는 것이 숫자로 나와 있다. 2012년 PD(프로그램 관리자) 제도가 도입된 후에는 스스로 기획하고 수행하는 셀프과제가 줄고, 주고받는 커넥션과 기관의 셀프과제가 크게 늘었다.
연구원 간 커넥션은 긴밀해지는 추세다.
A 연구원이 과제를 기획한 후 B 연구원이 수행하도록 밀어주면, 나중에 B 연구원이 과제를 기획해 A 연구원에게 밀어주는 식이다. 전체 기획자 7,545명 중 14.4%인 1,085명은 과제를 주고받는데 관여해 평균 5.41건을 밀어주고, 1.61건의 과제를 받았다.
커넥션이 2번 이상 있는 경우도 3,221쌍이나 됐다. 한국광기술원의 한 연구원은 같은 기관의 다른 연구원과 9건, 567억 원의 과제를 주고받았다. 한국전자부품연구원의 백 모 연구원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조 모 연구원은 7건, 645억원의 과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등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600억 원이 넘는 과제가 두 연구원 사이에 오갔다. 또 한국전자부품연구원의 이 모 연구원은 35명과 과제를 주고받는 등 연구원들의 유착관계가 점차 확대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관 간 밀어주기도 공식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안 주면 못 받는 구조'가 됐다.
과제 기획에 참여한 1,510개 기관 중 절반에 가까운 695개 기관이 과제 주고받기에 참여했다. 이들 기관은 평균 5.52건의 과제를 수행했는데 이 중 95.4%에 달하는 5.26건이 밀어주기의 결과로 나타났다. 밀어주지 못하면 받지도 못하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한 R&D 평가위원은 "산기평 과제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 R&D 과제도 연구원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며 "기획자와 수행자 간의 사회관계망 분석 등을 통해 최소한의 파이어월(차단막)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