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다른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개혁 의제와 정책 담론을 제시했다. 고인의 전공이 정치 분야이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에 대한 재평가는 정치 영역에서 가장 많이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경제ㆍ사회정책의 영역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매우 많은 정책 의제를 던졌다.
욕망에 자리 뺏긴 '희망의제'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중심ㆍ국가균형발전ㆍ동반성장ㆍ사회투자는 가치와 희망의 의제에 가까웠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던 한반도대운하ㆍ747공약ㆍ뉴타운은 물질과 욕망의 의제다.
노 전 대통령이 던진 희망의 의제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욕망의 의제에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성장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많은 경제ㆍ사회정책 의제들은 현실 속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 초기의 동북아중심 구상은 의도와 내용이 무엇인지 의심을 받더니 동북아시대 구상으로 바뀌고도 내용을 채워넣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의 생존과 발전에 한ㆍ미 간 동선 못지않게 한ㆍ중 간 동선이 중요해지고 있다. 동북아라는 공간이 우리의 주요 생활권역으로 등장하고 있기에 동북아 의제는 매우 중요하다.
개방은 한국 경제에 있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방의 형태와 속도는 선택할 수 있다.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빅뱅형 개방보다 단계적 개방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부동산 문제는 금융화의 문제였다. 따라서 좀 더 일찍 조세 중심의 접근보다 금융 측면에서 접근했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국가균형발전에서 선택과 집중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지지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정책 의제들이 좀 더 잘 집행되고 현실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내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그 목적을 성취하고 나면 희망은 더 이상 희망으로 존재하지 않고 소유가 돼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노 전 대통령은 희망의 의제를 던졌다. 이를 상상력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동북아를 국가균형발전 의제와 결합해보는 것(동북아로 열린 지역클러스터), 개방과 사회투자를 결합해보는 것(개방경제 하의 복지국가), 이를 통해 당대의 실현 가능한 정책대안으로 형성하는 것 모두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대운하ㆍ뉴타운을 만들고 자사고를 확대하며 출자총액제한제도, 금산분리, 그리고 비정규직법을 버리는 것이 아닌 다른 희망의 길이 현실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희망과 상상력이 우리가 생존하고 진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욕망의 경제를 넘어 가치의 경제로 나아가는 길이다. 욕망은 인간 행위가 자기보전의 목적을 지향하기 위한 심리적 동인이다. 적절한 정도의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과도한 욕망은 주변인에게 피해를 입히며 자신 또한 망친다.
상상력으로 '희망의제' 구체화를
반면 희망은 열렬한 소원이나 확신에 찬 기대감으로 미래를 향한 것이다. 희망은 선한 것, 미래에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경제는 돈과 국내총생산(GDP)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지향의 영역이다. 미국이 “우리의 가치와 정신생활이 적어도 GDP만큼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버락 오바마를 가졌다면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지난 노무현을 가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셨어도 노무현이 제시한 희망과 가치는 우리와 같이 할 것임을 믿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