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28일] 바운티호의 반란

1789년 4월28일, 남태평양. 영국 군함 바운티호에서 선상반란이 일어났다. 폭정을 일삼던 블라이 함장 등 19명은 쪽배에 실려 바다에 버려졌다. 바운티호는 타히티섬으로 항로를 되돌렸다. 세 차례나 만들어진 영화 때문인지 장면이 낯설지 않다. 영화의 골격은 폭압과 정의의 대립, 원주민과 수병간의 사랑이지만 실제는 보다 복잡하다. 바운티호의 공식 임무는 측량이었지만 실제는 ‘빵나무’ 호송. 빵과 비슷한 맛을 내는 열매가 달린 빵나무를 서인도제도까지 옮기는 게 비밀 임무였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50만명의 노예에게 비싼 곡물 대신 빵나무를 먹여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심산. 카리브해 지역에서 발생한 노예들의 반란으로 식량화 계획은 흐지부지됐지만 빵나무는 지금도 대체식량과 약용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바운티호 사건은 영국의 노예제도 공식폐지(1833년)에도 영향을 미쳤다. 6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한 해군이 205톤 짜리 연안용 민간상선 ‘베시아’호를 1,950파운드에 구입해 개조비용 4,456파운드를 들여 군함 바운티호로 바꾼 연유에서부터 밀수업자들이 판치던 노예무역에 관여한 이유를 추궁하는 과정은 노예폐지론의 목소리를 높여줬다. 선원들의 흔적도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추적을 피하려던 수병과 섬처녀들의 후손 2,100여명은 영어와 타히티어가 섞인 언어를 사용하며 남태평양 노퍽ㆍ핏캐언섬에서 살아가고 있다. 근친혼 때문에 기형이 많은 편. 블라이 함장 일행은 7주간의 표류 끝에 피지를 발견, 살아 남았다. 평화롭던 피지는 영국이 이주시킨 인도인과 원주민간 인종분규 지역으로 변했다. 남태평양의 낭만 속에 감춰진 탐욕과 제국주의 침탈의 상흔이 200년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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