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따뜻한 가슴 냉철한 복지정책


지난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내외적 충격을 흡수할 사회적 장치가 얼마나 빈약한지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일할 의지만 있다면 잘 살 수 있고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오랜 통념이 대량 실업 사태 속에서 뿌리째 흔들렸다. 그 여파로 사회보장에 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가 2000년에 도입됐다. 빈곤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취약층 보호와 패자부활전 마련에 국가가 뒷짐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의 전환은 적군처럼 몰려왔던 외환위기가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준 축복이었다. 기초생보制 형평성 문제 심각 새로운 제도는 따뜻한 가슴으로 설계됐다. 일할 수 있는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정부가 보장하도록 규정했다. 개인의 책임 여부를 떠나 빈곤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모두가 모두를 돌봐야 한다는 연대의 정신이다. '사회적 연대'라는 말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지만 외환위기로 모두 어려웠던 만큼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설계방식은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축복은 빠르게 낭비됐다. 기초수급자는 저임금 근로자보다 높은 소득을 보장받을 뿐 아니라 임대주택, 대학생 장학금, 난방요금, 인터넷 등 30여가지 지원도 받을 수 있다. 본인 부담이나 이용 제한이 거의 없어 1인당 진료비는 건강보험 가입자 평균의 네 배에 이른다. 그러니 수급자격을 따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일을 해서 자립할 유인은 없다. 근로무능력 판정을 받으면 자활사업에 참여하라는 간섭도 안 받으니 동네 의사에게 근로무능력 진단서를 받는다. 설문조사에서는 수급자 중 근로능력자 비율이 60%를 넘지만 공식적 분류에서는 20%에 불과한 까닭이다. 생산적 복지의 대표 사례라는 자활사업은 한시성을 명시하지 않아 수급자를 노동시장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분리시키는 게토(ghettoㆍ강제로 격리시킨 유대인 거주지구 또는 소수자 집단 밀집 거주지구)가 돼버렸다. 반대로 자활소득보다 더 벌 수 있는 사람은 소득을 숨기기 쉬운 일만 골라 하며 수급자 혜택과 근로소득을 같이 챙긴다. 경쟁력이 약한 사람은 굳이 일자리를 찾을 이유가 없고, 경쟁력이 있는 사람은 능력을 개발하기보다 비공식 부문에 머무르니 취약층 보호를 위한 제도가 실제로는 이들의 삶의 가능성을 억누른다. 개인이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제도가 방해하는 셈이다. 게다가 눈 밝은 사람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지원을 확보하니 어려운 사람 간의 형평성 문제 역시 심각하다.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정책설계자의 따뜻한 이상이 현실 세계에 가져온 폐해다. 그런데 이는 비단 기초생활보장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미를 과시하느라 충분히 예측되는 부작용을 무시하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 복지정책 설계의 문화가 돼버렸다. 2008년 도입된 기초노령연금제도는 노인을 배려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동거 자녀의 경제력마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서울 강남의 최고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수급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기초노령연금 월 10만원은 용돈도 안 되지만 안 그래도 고령사회의 무게를 힘겹게 감당해야 하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근로기간 내내 지고 가야 하는 세금 부담이다. 따뜻한 복지 부작용 정비해야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은 정책연구자들에게 등불과 같은 존재이다. 케인즈의 스승이었으며 윤리학자이기도 했던 그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꼽은 것은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이다. 그런데 경제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세계가 전력하는 지금, 우리의 정치인과 관료는 가슴이 따뜻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만 골몰한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냉철한 이성으로 복지제도를 정비해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가슴의 온도는 각자 조용히 느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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