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다시 찾은 淸溪川 걷기

청계천 물길을 다시 찾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600만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새로 열린 물길을 걸었고 지방 관광객들도 80만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5.8㎞에 지나지 않는 청계천 복원에 대해 국민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엄청난 유적이 있다거나 경제적 부가가치가 월등해서는 아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 물길 옆으로 아침에 달리고 점심 때 산책하며 저녁 때 데이트할 뿐이다. 인류는 수백만년 전부터 걷기 시작했지만 도심 속에서 걷기가 보편화된 것은 200년도 채 안된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8세기 런던 거리는 거지와 부랑아와 창녀들로 가득 차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67년 복개하기 전 청계천과 비슷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존 게이가 1716년 ‘사소한 것, 혹은 런던거리를 걷는 기술’이라는 시를 썼겠는가. 그는 흙탕물이 튀기는 것을 피하고 습격이나 모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비법을 내놓았던 것이다. 도시인에게 걷는 기쁨 선사 도시의 거리가 생기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걸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스승과 제자가 아카데미의 회랑을 나란히 거닐며 토론했고 중세 때에는 성지 순례길에 올랐으며 근대 이후에는 더러 통행료를 내기도 했지만 사유지였던 사냥터나 개인이 만든 정원을 걸었다. 반면 비대해진 도시가 소비와 생산을 중심으로 구획되자 사람들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 도심길을 걷고 있다. 물론 현대 도시에도 공원이나 광장이 있어 산책이나 조깅을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는 거리를 걷는 것과는 다르다. 청계천 걷기는 걷기의 역사로 살펴볼 때 분명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에 해당된다. 고궁이나 박물관을 찾는 것처럼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려는 것도 아니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내려 걷는 여행길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나 청계천 걷기는 현대 도시의 다운타운을 걷는 것과도 다르다. 높이 솟은 빌딩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지만 자동차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고 억지로 눈길을 끄는 요란한 쇼윈도나 시끄러운 호객소리도 없으며 강남의 양재천처럼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도 없다. 시골길 걷기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 셈이다. 하여튼 다시 공적 공간이 된 청계천 길은 딱히 도심길도 아니고 시골길도 아니지만 서울 시민들에게 걷는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친환경 생태하천으로 가꿔야 청계천 이전에도 서울에서 걸을 길은 많았다. 시인 김연신은 서울의 선경(仙境)으로 개나리가 만발한 봄의 응봉산과 눈 내린 겨울의 북한산 등과 함께 여름 남산길을 권한다. 국립극장 옆에서 남산 팔각정을 거쳐 남산 시립도서관까지 이어지는 시원한 숲길을 걸으면 나무들의 분주한 탄소동화작용으로 근로의 경건함을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남산길은 산길이고 청계천길은 물길이다. 남산길이 남성적이라면 청계천길은 여성적이다. 옛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재현되고 마임 배우의 거리 오디션 등이 눈길을 끌어 더욱 그렇다. 230여년 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큰 눈이 내려 달빛이 더욱 교교했던 수표교에서 풍무(風舞) 김 억(金 檍),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등과 함께 북경서 갓 가져온 철현금(鐵絃琴)과 가야금, 퉁소, 생황 등으로 즉흥 심야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청계천 물길이 다시 열린 이제 어둡던 과거를 덮어두었던 우를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다시 열린 청계천길이 품은 익명성은 매춘이 속삭이는 야밤의 남산길처럼 언제든지 타락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좀더 생태적으로 조성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청계천의 내일은 오늘 그 물길 옆을 걷는 사람들과 아직 있는지 모르지만 ‘청계천 걷기클럽’ 같은 애호가들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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