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4위의 경제대국인 무적함대 스페인호가 빠른 속도로 침몰하고 있다. 스페인 중앙은행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지난 1ㆍ4분기 해외로 빠져나간 자금이 970억유로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지난 한해 동안 스페인에서 빠져나간 978억유로와 맞먹는 규모다.
특히 가장 최근인 지난 3월에는 총 662억유로의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는 1990년 중앙은행이 공식적인 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고치로 시간이 갈수록 자본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기록적인 자본 유출은 스페인 정부가 양대 뇌관인 은행권 부실과 지방정부의 부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해외투자가들의 신뢰가 크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그라프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스페인 국채 비중은 지난해 40%에서 현재 30%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스페인의 5년물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지난달 31일 599.33 베이시스포인트(bp)까지 치솟았다.
문제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IHS 글로벌 인사이트의 라즈 바디아니 이코노미스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데이터는 나오지 않았지만 4월 이후에는 자금 유출이 더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며 "조만간 퍼펙트 스톰이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스펙시트(Spexitㆍ스페인의 유로존 이탈) 위기가 고조되면서 스페인 구제금융설도 확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31일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국제통화기금(IMF)이 스페인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등 비상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는 오는 4일부터 실시되는 IMF의 스페인 경제 실사 이후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IMF와 스페인 정부는 구제금융설을 일단 부인하며 파문 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구제금융 요청을 받지도 않았으며, 그런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다. IMF는 "스페인 경제 실사는 정기적인 것"이라며 "담당 지역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은 IMF 본연의 기능"이라고 설명했다. 루이스 데 긴도 스페인 재무장관도 "난센스"라며 구제금융 가능성을 일축했다.
스페인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ECB도 시장 불안감에 최소화하는데 심혈을 쏟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달 31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스페인의 부실은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기된 유로안정화기구(ESM)의 자금 활용 방안과 '유럽 은행 통합 구제안'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은행연합이 "유럽 각국이 공동으로 은행을 지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는 재정통합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드라기 총재는 스페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는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스페인 3위 은행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 방키아 문제를 거론하며 "스페인 정부가 수 차례 문제의 심각성을 잘못 평가했다"며 "이로 인해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드라기 총재는 특히 추가 무제한장기대출(LTRO)에 대해서는 자금도 부족할뿐더러 시기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난색을 드러내 스페인 위기 해법 도출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지도자들의 리더십 부재도 여전히 문제다. 이그나치오 비스코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FT와의 인터뷰에서 "3차 LTRO를 배제하지 않고 있으며, ECB가 필요할 경우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ECB 내에서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