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십(gunship)이라는 게 있다. 대포를 비행기에 싣고서 지상 목표를 공중 폭격하는 무기다. 월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가장 두려워했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건십은 병력수송과 낙하병 공수를 주임무로 삼는 수송기의 개조형이다. 건십을 보유한 나라는 미국뿐이다.
한국에도 건십이 있다. 국방부가 아니라 금융당국이 그렇다. 민간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인선에 대한 금융당국의 인사간섭이 딱 그 모양이다. 낙하산 인사가 어려워지자 금융기관장으로 민간인을 세워놓고 높은 곳에서 알게 모르게 통제하는 게 마치 수송기가 변해 건십이 된 것과 비슷하다.
주택금융공사 사장이 민간으로 채워진 데 이어 기업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장, 통합증권거래소 이사장 등 굵직굵직한 자리가 공모를 기다리면서 민간 CEO탄생에 대한 희망 못지 않게 불안감도 크다.
지난 2002년4월 선임된 한 시중은행장은 노조가 희망했던 민간 전문경영인 이었지만 관(官)의 힘에 눌려 제대로 일해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당초 금감원 고위당국자를 강력히 추천했던 금융당국은 해당은행 노조가 `낙하산 반대`운동을 벌이자 노조가 원하는 민간인이라며 그를 은행장으로 전격 선임했다. 은행 경험이 없었지만 은행 경험이 없던 김정태 국민은행장도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밀어 부쳤다.
당시 한 관료가 사석에서 한 발언이 2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를 스친다. 그는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 은행에게 보여주겠다”고 했고, 그 후 정부의 교묘한 방해에 질렸던지 해당은행 노조는 “왜 낙하산 반대운동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기업은행장 공모를 앞두고 지난달 2일 “낙하산 인사하면 강력히 투쟁하겠다”던 성명서를 내놓았던 기업은행 노조가 2차 성명서에서는 “낙하산도 괜찮으니 힘있는 은행장을 보내달라”고 밝힌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능력이 뛰어난데도 관료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배제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정작 민간CEO를 옹립한 후 현직 관료들의 흔들어대기 역시 사라져야 마땅하다. `봐라. 역시 관료가 낫지 않느냐`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민간인CEO에게 가해질 어떤 형태의 간섭도 배제돼야 한다. 금융기관 민간CEO에 대한 관료들의 배려는 취임이후가 더 중요하다.
<정승량기자 (경제부) sch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