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글로벌 포커스] 濠, 뿌리깊은 원주민 멸시… 건국이념 '평등주의' 무색

다시 부각되는 백인 우월주의<br>정부 차별정책 공식 폐기 불구 경제·교육 환경 여전히 열악<br>임시직등 단순 노동직 내몰려, 최근 '천막 대사관' 사건으로<br>아물지 않은 상처 다시 불거져 정착민과의 갈등 불씨 여전


영국에서 차별 받던 하층민과 범죄자들이 1788년 1월26일 호주에 유럽인의 정착지를 세운 지 200여년이 지났다. 영국에서 상류계층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던 그들은 호주라는 새로운 대륙에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려는 희망에 부풀었다. 호주의 건국이념인 '평등주의(Egalitarianism)'에는 이 같은 열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당시 정착민들의 소망은 백인들만의 꿈으로만 결실을 맺었다. 호주 원주민들인 애버리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유색인종에 대한 호주인들의 멸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호주 최대 국경일인 '호주의 날'을 맞아 수도 캔버라의 한 식당에서 열린 훈장 수여식에 참석한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원주민들로부터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호주의 해묵은 인종 문제가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토니 애버트 야당 지도자의 발언 때문이다. 이날 총리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 애버트 연합 야당 당수는 행사 참석 전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진이 호주 정부의 차별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1972년 옛 국회의사당 앞에 설치한 '천막 대사관'을 철거할 때가 됐다고 말해 원주민들을 자극했다. 이날 마침 천막 대사관 설치 40주년을 기념해 전국에서 몰려든 원주민들은 이에 항의해 30분 동안이나 행사장을 봉쇄했으며, 길라드 총리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구두가 벗겨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디 오스트레일리안'을 비롯한 호주 언론들은 일제히 호주 사회의 오래된 숙제인 원주민과 정착민 간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그 동안 호주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뿌리 깊은 차별정책= 지난 1788년 영국인들이 호주 대륙에 첫발을 디딘 이후 이민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원주민에 대한 차별 정책을 유지해왔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비인간적인 처우를 당했으며 아직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호주 정부는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1970년까지 무려 140여년 동안이나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가혹한 원주민 동화(Breed out the Color)정책을 펼쳤다. 호주 정부는 원주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을 백인 가정에 입양시켰다.


당시 백인 가정에 입양된 많은 원주민 아이들은 백인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삶이 망가졌다. 심지어 당시 이들을 입양한 백인 부모들은 원주민 아이들에게 신체적ㆍ성적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 이들은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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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2월 캐빈 러드 전 총리는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호주 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이 같은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아직까지 호주 원주민들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일반 호주인들에 비해 열악한 삶 = 호주의 대표적인 원주민으로 알려진 애버리진과 토레스 해협에 거주하는 52만(전체 인구의 약 2.5%) 원주민들은 일반 호주인들에 비해 경제ㆍ교육ㆍ건강ㆍ문화적으로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물론 현재 호주에서 원주민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정책은 공식적으로 폐지된 상태다. 지난 1967년 호주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원주민을 호주 국민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무려 90.8%의 호주인이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호주 사회에서 원주민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우선 많은 원주민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면서 각종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 2006년 호주 정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州)에서 원주민의 실업률은 20.3%에 달했다. 일반 호주인의 실업률(7.5%)에 비해 3배나 높다.

특히 원주민들의 경우 일반 호주인들에 비해 임시직으로 일하는 비중이 두 배나 높고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원주민이 일반 호주인에 비해 좋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로 주거 불안과 열악한 교육 환경을 꼽고 있다.

또 불과 23%의 원주민들만이 호주의 정규교육과정인 12학년을 모두 마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반 호주인들이 12학년을 모두 마치는 비율은 49%로 원주민의 두 배를 넘는다. 원주민들과 호주인들 간 인종에 따른 임금 차별도 문제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원주민들의 임금은 같은 일을 하는 일반 호주인들의 62%에 그치고 있다.

원주민들의 건강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호주 정부가 지난 1990~2001년 사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원주민 남성과 여성의 평균수명은 각각 59세와 65세로 일반 호주인들에 비해 17년이나 짧다. 호주 원주민들은 미국과 캐나다ㆍ뉴질랜드의 원주민들과 비교해도 4년에서 10년 정도 수명이 짧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이에 대해 "호주는 전세계에서 원주민들의 건강과 삶의 질이 퇴보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호주는 20세기 초 연방 형성 당시부터 1973년 '백호주의'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기 전까지 철저하게 백인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펴왔다.

이후 아시아 지역과의 경제교류 강화를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색인종과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호주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백인을 우선하는 정서가 남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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