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강산관광 답사기] 새벽녘 금강산 산자락 어렴풋...

金東珍체이스맨햇턴은행 서울본부장지난 14일 분단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금강산 단체관광 시험운항에 초청받아 금강산을 다녀온 김동진(金東珍) 체이스맨해튼은행 서울본부장이 금강산 기행기를 본지에 보내왔다. 金본부장의 기행기를 두차례에 나춰 소개한다. 1998년 11월14일 이른 아침, 그렇게도 그리던 금강산을 보러간다는 설레임속에서 대충 아침을 들고 집을 나섰다.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차창밖으로 한강 수면에 비치는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면서 어린아이처럼 그저 기분이 좋았다. 시험운항이긴 하나 최초의 공식 금강산 여행길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크나큰 행운인데 날씨까지 마치 9월의 초가을 맑은 날씨처럼 화창하니 얼마나 분에 넘친 행운인가. 9시20분 김포공항 집합장소에서 같이 가게 된 일행을 만났다. 내가 속한 6조는 평소 알고 지내던 반가운 얼굴들인 외국은행 관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가 소풍가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오전 10시 김포공항 활주로를 미끄러져간 비행기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인한 상념의 여유도 주지않은 채 곧바로 강릉공항에 도착했다. 동해관광호텔에서 강원도의 명물이라는 초당두부로 점심을 하고 버스편으로 배를 탑승하게 될 동해시로 향했다. 동해시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먼저 안보교육장으로 향했다. 2시간동안의 안보교육은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국제정치학 공부도 하게 되었고 금강산사업의 경제성에 대해서도 세세히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9억달러이상을 지불하면서 벌이는 이 사업의 경제성에 의구심이 없지 않았지만 이 사업은 경제적 가치의 잣대로만 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안보교육장을 나서면서 내가 분명 민족분단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됐다. 교육이 끝나자 각 언론매체에서 금강산 방문소감에 대한 인터뷰와 함께 카메라 플래쉬가 터져나왔다. 버스에 탄 우리 일행이 시내를 빠져나와 부두로 향하면서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크루즈선이 건물사이사이로 비춰졌다. 부두에 가까와지면서 길이 200미터가 넘는 현대 금강호의 위용이 하얀 색깔이 던져주는 여유로움과 어우러져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비추는 플래쉬와 함께 우리는 출국아닌 출국의 승선수속을 밟았다. 출입국 수속같은 절차를 밟으면서, 우리 땅에 가면서 다른 나라 가는 것같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 현실이 약간 머리를 무겁게 했다. 춘원선생은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차창밖의 온갖 풍경을 음미하면서 금강산 입구 고산역까지 가셨다는데. 따뜻한 환대속에서 현대 금강호에 탑승하자 필리핀에서 왔다는 안내인이 5층에 있는 객실로 안내했다. 객실은 기대보다 시설이 좋았고 깨끗했다. 간단히 여장을 풀고 몇개월전 관람했던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리면서 배 구석을 둘러보았다. 1,000명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크루즈선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은 다 갖추고 있고 시설도 비교적 훌륭했다. 여정보다 1시간 늦은 6시20분경 승무원을 포함, 900여명을 태운 현대 금강호는 동해항을 서서히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으며 부두앞 한켠에선 연한 어둠속에서 화려한 불빛을 발하면서 몇척의 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9층 라운지에서 역사적인 배의 출항의 주인공이자 증인이 되면서 담소를 즐겼다. 7시경 우리는 뷔페음식으로 저녁을 들었다. 8시부터는 6층 연회장에서 공연이 있었다. 사회자의 분단의 아픔이 섞인 멘트는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객실로 돌아와 파도가 치는지 배가 약간 흔들림을 느끼면서 내일의 역사적 금강산행을 위해 일찍이 잠을 청했다. 15일 아침 6시경 모닝콜에 눈을 뜨고 얼른 차창 밖으로 달려가 커튼을 거뒀다. 아직은 캄캄했다. 시간을 아끼고 싶은 마음에 금새 아침을 먹었다. 무엇이든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7시넘어 동해의 태양과 함께 내륙쪽으로 금강산의 끝자락으로 추정되는 산자락이 보였고 자그마한 선박과 군인 막사같은 집, 군함같은 배도 보였다. 이곳이 장전항이란다. 안보교육에서 들은대로 혹시 입북시 어떤 꼬투리를 잡힐까봐 의심나는 물건은 전부 배에 두고 하선을 준비했다. 날씨는 무척 맑았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선지 예정된 하선시간이 훨씬 지나 하선하라는 연락이 왔다. 11시가 넘어 모두 일반 여객선같은 자선으로 옮겨탔다. 배가 육지에 접안하자 우리는 연결된 바지선을 통해 하선했고 주위를 둘러보니 북한군들이 경계를 서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군의 나이는 어려보였지만 비교적 건강한 모습들이었다. 짐검사를 받는 세관검색대에서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하선을 마치고 우리는 지정된 버스에 올라 11시20분 관광길에 나서게 됐다. 새로 낸듯한 도로에 철책들이 쳐있었고 중간중간에 북한군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옛날 도로가 있는데 아이들과 주민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고 산자락엔 바다쪽을 향한 포신(砲身)이 보였다. 5분쯤 가자 마을이 나왔고 주민들이 일하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온천으로 유명했다는 온정리란 마을이란다. 아마도 이번 사업때문인지 집을 여러채 새로 짓고 있었다. 물이 많지않아 보이는 냇가에서는 아낙네들이 배추를 씻는 모습도 보였고 빨래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온정리에서 산쪽으로 하얀 5층쯤 되어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김정숙 여관이란다. 투숙객이 있다고 상상할 수 없을만큼 조용했다. 온정리 주위의 산하에는 나무가 많지 않았다. 온정리에서 버스 차창 너머로 반대편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설악산에서 볼 수 있었던 기암괴석 비슷한 산봉우리가 뭉게구름에 가린채 눈에 들어왔다. 분명 소동파도 그렇게 칭찬했다는 금강산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1시40분 온정리를 지나 우리는 구룡폭포로 향했다. 산길을 달리면서 하늘을 찌를듯한 소나무를 보고 온정리 주위의 벌거숭이산과는 너무도 큰 차이를 느꼈다. 20미터이상으로 보이는 소나무들이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들이 바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미인송이란다. 조금 올라가니 공터가 보인다. 옛날 신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잔해만 남아 있었다. 12시 15분경 국내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었던 목란관을 지척에 두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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