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29일] 리슐리외

대신들이 놀랐다. 국왕이 성직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어전회의에 입장했기 때문이다. 1624년 4월29일 루이 13세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회의격인 어전회의 참석은 각료로 임명한다는 뜻. 그는 1642년 사망할 때까지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주인공은 리슐리외(Richelieu).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악의 화신으로 묘사된 리슐리외 추기경 바로 그 사람이다. 간신으로 왜곡된 리슐리외는 부국강병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인물. 프랑스의 기초를 닦았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1614년 소집된 삼부회.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앙리 4세와 결혼한 후 남편이 죽자 섭정으로 군림하던 마리 드 메디치가 열네살 난 아들 루이 13세와 스페인 공주와의 결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에서 29세의 리슐리외는 명연설로 결혼을 성사시키며 이목을 끌었다. 리슐리외는 한때 루이 13세의 반대편에 서기도 했지만 둘은 궁합이 맞았다. 절대권력을 유지하려던 국왕과 강한 나라를 꿈꿨던 리슐리외는 왕권강화라는 목표 아래 하나였다.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지역별 표준징세제도를 도입한 것도 체제강화를 위해서다. 기득권 상실에 맞서 반란까지 일으킨 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그가 프랑스 전역에 깔았던 첩보조직을 근대적 관료제도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국제종교전쟁이었던 30년전쟁에서 리슐리외는 구교 형제국 스페인을 견제하려고 신교국 스웨덴과도 손잡았다. 추기경의 신분임에도 국가이익을 종교보다 우선시, ‘신구교 동맹’의 첫 사례를 남긴 셈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캐나다 퀘벡주의 리슐리외강에서 흐른다. 프랑스 국립박물관 제1전시실 이름도 리슐리외실이다. 나라의 기틀을 잡으려 애쓴 재상을 기리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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