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버를 뽑아 들고 어드레스를 하려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20m 전방에서 코스를 가로지르며 달음질친 것은 분명 노루였다.
청정지역 제주 골프장에서는 야생 동물들이 심심찮게 목격되지만 승부가 걸린 마지막 홀 티샷 직전 등장한 녀석은 우승 퍼트를 하려는 찰나 헛기침을 한 갤러리와 같았다. 특히나 전략적인 드라이버 샷을 요하는 남제주군 클럽나인브릿지 하일랜드 코스 9번홀(파5ㆍ538야드)이라 노루의 선한 눈망울도 얄밉게 느껴졌다.
이 9번홀은 두 얼굴을 가졌다. 여기선 코스 설계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보상과 징벌’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티잉그라운드에 서면 전략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겸비한 웅장한 마무리 홀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전체적으로 내리막이면서 살짝 왼쪽으로 휘어져 파5로는 긴 편이 아니다. 아마추어가 주로 이용하는 화이트(레귤러) 티박스 기준으로 490야드 정도다. 그린과의 22m 표고 차 때문에 실제 거리는 이보다 더 짧아진다.
짧은 거리를 벌충하고 난도(難度)를 높이는 것은 2단 구조의 페어웨이와 호수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아일랜드 그린이다.
이 홀은 티샷에서 두 가지 공략 방법 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한다. 오른쪽 페어웨이에 안착시키기는 무난하다. 워터해저드 앞까지 150야드 정도 끊어간 뒤 어프로치 샷으로 3온을 할 수 있다. 비교적 안전하지만 버디 확률은 낮아진다.
두 번째 공략 루트는 왼쪽으로 날리는 지름길이다. 페어웨이 한가운데 숲을 넘겨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공사 당시 원시림을 그대로 살린 이 ‘소렌스탐의 숲’은 레귤러 티박스에서 200야드 정도면 넘길 수 있다. 제대로 넘겼을 때 그린까지 남는 거리는 약 200야드. 2온에 도전할 만한 거리다. 이글이나 버디의 달콤한 보상이 유혹한다.
문제는 실수에 따르는 페널티도 가혹하다는 점이다. 오른쪽으로 밀리거나 탄도를 확보하지 못하면 숲의 심술에 시달린다. 자그마한 이 숲 속에선 볼을 찾기도 어려워 2타 이상 까먹기 십상이다. 정면이나 왼쪽에서 바람이 불 땐 욕심을 버리는 게 현명하다. 2005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CJ나인브릿지 클래식 최종 3라운드 때 ‘골프여제’ 아니카 소렌스탐(43ㆍ스웨덴ㆍ은퇴)이 티샷을 이 숲에 빠뜨렸다. 기대했던 이글 대신 보기를 적어내며 우승과 멀어진 후 숲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별칭이 붙었다.
크리크코스 4번홀(파4ㆍ331야드)은 두 번째 샷에서 큰 건천을 넘겨야 한다. 그린이 오르막끝에 있으며 좌측에는 자연수림대와 벙커, 우측에는 계곡이 있어 어프로치 하기에 매우 까다롭다. 강풍이 불었던 2003년 대회 때 박지은(34ㆍ은퇴)이 3타를 한꺼번에 잃고 우승을 이듬해로 미뤘던 곳이기도 하다.
2001년 개장한 나인브릿지는 한국 대표 골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큰 재산이다. 부지 내에 제주도 특유의 건천이 크게 두 갈래로 지나가고 울창한 원시 수림대가 형성돼 전략적인 골프코스를 조성할 수 있었다.
한국 골프장 역사에 ‘최초’ 기록도 여럿 남겼다. 2005년 미국 골프매거진 선정 세계 100대 코스에 국내 골프장으로는 처음으로 포함됐다. 직전인 2011년 선정에선 전세계 3만6,000여 곳 중 49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최초로 페어웨이에 그린 잔디와 같은 벤트 그래스를 식재해 격을 높였다. 잘 관리된 코스는 전체가 녹색의 카펫 같다. 미국 LPGA 투어 대회(2002~2005년)를 유치한 것도 우리나라 최초였다.
아울러 세계 100대 코스들과의 교류로 민간외교에도 기여하고 있다. 나인브릿지는 세계 유일의 클럽 대항전인 월드클럽챔피언십(WCC)을 5차례 개최했다. WCC는 나인브릿지와 다른 세계 100대 코스에서 격년으로 열리는데 제10회 대회가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제주에서 펼쳐진다. 부동의 1위 골프장인 미국 파인밸리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호주 로열멜버른 등 콧대 높은 14개국 22개 명문 골프장 아마추어 대표(클럽챔피언)들이 집결해 자존심 대결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