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 기차가 추상파 탄생 시켰다 ?

■ 눈의 황홀(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기차의 빠른 속도 때문에 차창 밖 풍경 눈으로 못 쫓아가

선·색채 등으로 생각·감정 표현

줄무늬 등 인간의 눈 현혹 시킨 다양한 테마의 기원·변천 담아



러시아의 추상파 화가인 칸딘스키의 ''철도와 성이 보이는 무르나우''. /사진제공=바다출판사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사진제공=바다출판사

"발 언저리에 핀 꽃은 이미 꽃이 아니라 색채의 반점, 아니 오히려 빨갛고 하얀 띠일 뿐입니다. 곡물 밭은 엄청나게 긴 노란 띠의 행렬, 클로버 밭은 길게 땋아 늘어뜨린 초록의 머리로 보입니다. 마을도 교회의 탑도 나무들도 춤을 추면서 미친 듯이 곧장 지평선으로 녹아듭니다. 마침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이 , 유령이 입국의 문 있는 데에 떠올랐다가 재빨리 사라집니다."

지난 1837년.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기차를 타고 본 차창 밖 풍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늘 보던 풍경이 기차의 속도로 인해 왜곡돼 보였기 때문이다.


'눈의 황홀'의 저자 마쓰다 유키마사는 기차의 발명으로 인해 속도를 눈으로 쫓아갈 수 없게 되면서 대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선, 색채 등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파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실제 추상의 본질이 속도라는 듯이 20세기에 접어들어 미래파(속도라는 주제에 민감했던 유파)가 등장하고 모더니즘(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운동)이 시작됐다.

책은 이처럼 추상을 비롯해 스트라이프(줄무늬) 등 인간의 눈을 현혹해 온 다양한 테마의 기원과 변천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개념들이 어떻게 시작됐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떤 형태로 변해왔는지를 꼼꼼히 살핀다.

동물보다도 느리고 하늘도 날지 못하는 인류에겐 오랜 세월 동안 속도는 극복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동굴벽화에 움직이는 동물이 많이 그려진 것도 속도에 대한 동경의 발로였을 것이다. '더 빠르게'를 바라던 인류에게 산업혁명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19세기 전반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증기기관차가 발명됐고, 1830년에 여객 철도가 개통돼 전 세계에 철도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기차로 여행하면서 차창을 통해 낯선 풍경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차로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차창으로 보는 풍경은 그 속도에 의해 깊이감과 디테일을 잃고 점차 평평해졌다.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이 속도에 의해 왜곡되면서 기억을 바탕으로 차창 밖 풍경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모호해진다. 이 모호함이 추상 표현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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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이미 유선형의 증기기관차가 선을 보였다. 공기 저항을 고려해야 할 정도의 속도가 아직 일반적이지 않았는데도 공기 저항이라는 문제가 일찌감치 부상했다는 것은 인류가 속도에 어느 정도 천착했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철도는 추상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사고를 크게 뒤흔들었다. 기차가 두 개의 레일 위를 안전하게 달리기 위해서는 직선으로 달려야 했다. 이로부터 선의 역사가 본격화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차의 차창, 두 개의 레일과 그것과 교차하는 듯 늘어선 침목, 여러 개의 차륜을 가진 차량 등으로 연속의 이미지도 수반됐다. 이것을 대량생산으로 이미지화한 사람이 헨리 포드다. 포드주의란 차 한 대의 조립 공정을 세분화해 단순한 노동으로 분해하고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조립되는 부품이 한 명의 노동자에게 머무는 시간을 될수록 짧게 해 생산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에서 항상 감시를 받으며 컨베이어 벨트 옆에 서서 조립된 부품의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스트라이프만큼, 인간의 눈을 현혹시킨 소재도 없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신 중심의 생활을 강요받고 기복이 적은 단순한 생활을 했다. 스트라이프는 너무 눈에 띈다는 점에서도 이단이었지만, 원래 이슬람교도가 몸에 걸치는 무늬라는 이유로 혐오 대상이었다. 사막이라는 가혹한 곳에서 생활하는 이슬람교도에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으로 연결돼 죽음을 의미했지만,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눈에 띄는 것이 죄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스트라이프를 직업 차별에 이용하고자 사회의 하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도록 의무화했다. 오랫동안 이 차별은 계속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인식이 바뀌어 귀족들도 스트라이프를 좋아하게 됐고, 인테리어에까지 사용될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국기에 사용되는 것으로 이어져 완전히 긍정적인 기호로 변했다.

색깔에도 이 같은 반전은 존재한다. 동양에서 노란색은 고귀한 색으로 취급됐다. 서양에서도 처음에는 노란색이 태양의 색에 가깝다는 이유로 풍요로운 색으로 숭상됐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가 입었던 옷이 노란색이어서 기피 대상이 됐고, 노란색은 유대인의 색으로 인종 차별을 상징하게 됐다.

이 같은 인식은 19세기 말 아방가르디스트들에 의해 노란색이 대중적인 색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책은 다양한 소재를 담고 있는 만큼, 480점의 도판을 실으며 독자들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도판들은 동서고금의 회화, 고대 벽화,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포스터, 공예, 문자 등 다채롭다. 1민9,800원


박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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