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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데뷔 20년 맞아 8집 발표 '봄여름가을겨울'

우기자의 로그인<br>"우리 음악의 지향점은 팬 여러분들이에요"<br>취직 고민하던 전태관에 김종진"CD 한장 내보자" 제안, 지금까지 계속 음악하게 돼<br>"샐러리맨 친구들 고민 많던데 좋아하는 음악하며 돈버니 우리는 행복한 셈이죠"



[리빙 앤 조이] 데뷔 20년 맞아 8집 발표 '봄여름가을겨울' 우기자의 로그인"우리 음악의 지향점은 팬 여러분들이에요"취직 고민하던 전태관에 김종진"CD 한장 내보자" 제안, 지금까지 계속 음악하게 돼"샐러리맨 친구들 고민 많던데 좋아하는 음악하며 돈버니 우리는 행복한 셈이죠" 우현석기자 hnskwoo@sed.co.kr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ImageView('','GisaImgNum_2','default','260'); 아파트 단지 안을 붉게 물들였던 벚나무 잎들이 정리되자 찻길의 은행 잎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카오디오 안으로 밀어 넣은 CD에서 음악이 흐르고 가로에 서 있던 은행나무들은 악보의 마디 처럼 하나씩 밀려갔다. 체증이 시작돼서 차가 멈춰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노래 가사가 머릿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슬퍼도 울지 않을거야/ 이제 힘들어 하면 뭐해/ 웃으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잖아/ 남 부럽지 않게 살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건만/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이/ 더 나아 보이는 걸까/ ‘봄여름가을겨울’의 신곡 ‘슬퍼도 울지 않을거야’의 가사가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따지 듯 귓전을 파고 들었다. 차창 밖 길어진 빌딩그늘 사이에 종종 걸음으로 퇴근 길에 나선 월급쟁이들의 행렬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구촌을 휩쓰는 금융위기 속에 겨울을 앞둔 그들이 품고 있을 상념은 뭘까?’하는 생각에 기자의 마음은 심란했다. 조수석 위에 있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데뷔 20주년 기념 8집 재킷에 눈길이 머물자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났던 김종진과 인터뷰 약속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20년 전 동년배들이 한 조각 빵을 위해 월급쟁이의 길을 택할 때 분연히 기타를 들었던 그들의 속내가 궁금하던 터였다. ‘그래! 나 같은 월급쟁이가 감히 엄두내지 못했던 길을 선택한 그들의 20년을 한 번 들어보자’ 기자는 다음 날 바로 약속을 잡았다. -두분이 처음 만난 게 82년이고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한 것은 88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86년에 결성됐었죠? ▦김종진(이하 김): 아마추어 밴드로 82년부터 전태관씨를 만나서 특별한 이름 없이 활동했어요. 전태관씨가 서강대 학생그룹 킨젝스 리더를 하고 있고, 제가 군복무중 낙도 위문 다니는 해군홍보단으로 있을 때 처음 만났어요. 내가 제대하고 전태관씨 졸업할 때가 86년이었는데 마침 시간이 맞아 떨어졌어요. 그때 고(故) 김현식씨가 우리를 부른거죠.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멤버가 4명이었는데 ‘비처럼 음악처럼’ 음반을 발표하고 난 후 김현식씨의 활동이 뜸해지자 멤버 두 명이 ‘사랑과 평화’로 갔고, 우리 둘만 남게 됐어요. ▦전태관(이하 전): 봄여름가을겨울이란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멤버가 4명인 줄 알아요. 하지만 앨범이 나올 때부터 둘이서 한거예요. -올해로 만 20년이 됐는데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두 분이 음악을 함께 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견해차는 있을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음악을 하는 두 분의 경우 표현 방법이나 해석에 대해 이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럴 땐 견해 차이를 어떻게 좁히시나요? ▦김: 음악을 하면 견해 차이나 해석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음악 하는 사람들은 아티스트라서 그런지 잘 삐치는 기질이 있어요. 그런데 다행히 전태관씨 하고 저는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는 찰떡 궁합 처럼 잘 맞았어요. 듣는 음악도 비슷하고, 추구하는 장르도 비슷했어요. 부닥치기 보다는 서로 의지가 됐어요. ▦전: 82년 만났을 때부터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만났지만 나이도 같고 해서 친구가 됐어요. 그 동안 이어온 우정이 깔려 있었어요. 음악만 가지고 만났으면 다퉜을 때 ‘까짓 것 너 아니면 못해’ 하고 헤어졌을 텐테….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요. -두 분이 20년 동안 몇 번이나 싸우셨나요? ▦전: 많이 싸우지는 않았어요. 남자들은 주먹다짐도 하고 그러지만 우리는 그렇게 싸운 적은 없고, 잔 펀치로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에요. -예술에 있어서 타협이나 조율이 가능한 것일까요? ▦김: 가능하다고 봐요. 타협과 조율이 없다면 아마 지구가 반으로 나눠졌을 거예요. ▦전: 둘이서 지혜롭게 잘 끌고 온 것 같아요. 누구 한 사람이 양보하면 ‘지난 번에 저 친구가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양보 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거지요. -2000년 2월 ‘봄여름가을겨울 生生 LIVE!’ 공연실황을 담은 음반 ‘해피뉴밀레니엄’을 2000장 한정 비매품으로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보내 줘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 때 까지는 없던 시도였는데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김: 둘이 같이 아이디어를 냈죠. ▦전: 김종진씨가 아이디어뱅크예요.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나와요. ▦김: ‘우리 둘 다’라고 한 것은 아이디어는 내가 내지만 결정은 전태관씨가 해요. 실현 가능성이 있으면 전태관씨가 결정을 해요. 그러니까 우리 둘의 아이디어죠.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매니저가 영수증 다발을 한 뭉치 내밀자 전태관이 받아서 살펴 보던 것이 생각났다. 영수증을 한 장씩 넘기던 예술가의 길쭉한 손가락은 현실을 계량하고 있었을 것이다. 질문은 다시 음악으로 돌아왔다. -두 분이 하시는 음악은 팬들 사이에서 퓨전 재즈(Fusion Jazz)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분은 퓨전 록(Fusion rock)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굳이 장르를 정하자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김: 우리가 맨 처음 음반을 냈을 때 수록된 곡이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전형적인 퓨전 재즈곡이었어요. 그 이후 앨범을 발표하면서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어요. 록, 펑크, 라틴 등 다양한 음악을 했어요. 지금까지 20년간 활동을 하고 ‘우리가 어떤 색깔일까?’ 돌아본 적이 있는데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아, 우리는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장르다. 팬들이 라디오에서 우리 노래를 들었을 때 이건 봄여름가을겨울풍의 음악이라고 하면 그게 가장 큰 영광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은 곡은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내가 걷는 길’ 같은 발라드 곡이었지요? ▦김: 대중들은 발라드를 좋아해요. ▦전: 봄여름가을겨울 음악 안에는 발라드도 있고, 펑크도 있고, 라틴, 락도 있고, 모든 요소들이 녹아 들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김: 우리가 잔잔한 곡들만 노래했더라면 여러분의 평가는 지금하고 많이 다를 거예요. 하지만 그런 곡들을 발표하면서 연주자로서 연주 곡도 발표하고, 공연 때는 새로운 연주법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왔어요. 그래서 봄여름가을겨울 앞에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자존심’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게 아닌가 싶어요. -어떤 평론가들은 봄여름가을겨울이 20년 넘게 팬들의 사랑을 받아 온 이유 중에 하나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음악적 신념을 꼽습니다. 하지만 김종진씨는 얼마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은 대중을 외면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을 봤습니다. 음악성과 대중성은 양립하는 개념입니까? 아니면 평행선을 그릴지언정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갈 수 있는 개념입니까? ▦김: 아! 왜 그렇게 심오한 질문을 던지십니까? 내 표정이 멍해지죠? 글쎄요. 200~300년전에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도 대중 앞에서 공연했던 음악가였고, 바하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어떤 음악가들은 대중의 외면을 받았지만, 스스로 대중을 외면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봄여름가을겨울의 목표는 바로 대중 여러분들이었어요. 소통을 마다 않으니 팬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정치가들 만의 덕목은 아닌 듯 싶었다. ▦전: 이런 건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시작했다가 둘 만의 봄여름가을겨울로 재출발 하면서 만들어 놓은 원칙이 하나 있었어요. 김현식씨의 이미지를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에 반주 음악은 하지 말자고 둘이 약속 했어요. 90년대는 나이트클럽 전성시대여서 많은 밴드들이 나이트클럽에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유명세도 타고 했는데 우리는 그게 싫었어요. ‘우리 음악을 들으러 와서 술 마시는 건 몰라도, 술 마시러 와서 우리 음악을 듣게는 하지 말자’고 했어요. 게다가 방송국에서도 밴드 이름이 없으니 부르지 않고 해서 거의 일이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우리 고집을 꺾지 않고 버텨 온 게 오늘 날의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전태관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을 하려고 했는데 김종진씨께서 취직하지 말라고 말리셨다고 하던데 그 때 얘기 좀 해주세요. ▦김: 초기에는 일이 많지도 않았고, 인정도 못 받고 하다 보니까 배 고픈 시절이 꽤 길었어요. 배 고픈 건 참겠는데 집에서 자꾸 돈을 타다 쓰게 되는 거예요. 그게 자존심이 상했지요. 게다가 전태관씨는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어요. 전태관씨가 친구들이 취직해서 돈 버는 걸 보고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노란 봉투에서 입사원서 세 장을 꺼내더니 ‘취직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막 말렸어요. 그렇지만 빵도 중요하잖아요. 그 래서 내가 ‘태관아, 그러면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산에 가서 2~3일 머리 좀 식히고 그때 결정을 하자’라고 했어요. 그리고 ‘음반 한 장은 내보자. 내 요구는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말하고 같이 설악산에 갔어요. 그런 데 이 친구가 설악산 중턱쯤 올라 가서 다리를 삐었어요. 그래서 내가 업고 날이 어둑할 때 쯤에야 산 밑으로 내려왔어요. 그랬더니 태관씨가 감동을 받아서 ‘그래, 음반 한 장은 내보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거예요. 사내들은 단순해서 자신을 알아 주는 열정에 넘어간다. 마초(macho:사내대장부) 이미지의 김종진은 그러고도 남을 만한 열정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비슷한 덩치의 친구를 업고 어떻게 그 험한 산길을 내려왔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수증을 넘기던 전태관의 손가락이 친구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아티스트의 손가락 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전: 사실은 저도 그 때 음악을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어요. ‘부모님께서 공부시켜 놓았더니 자기 밥벌이도 못하면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거지요. 자기 자신이 한심해 보여서 입사원서를 가지고 왔던 거예요. -전태관씨는 그 때 택한 길로 20년을 걸어오셨습니다.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까? ▦전: 아유! 그럼요. 없어요 ▦김: 미련은 없어요. -두 분의 자산 관리가 궁금한데 혹시 펀드나 주식하십니까. ▦김: 했었죠. ▦전: 그 얘기 나오니까 얼굴이 어두워졌잖아요. 아마 요새 펀드나 주식을 하는 사람치고 손실을 안 봤다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어요? ▦김: 저는 제 인생에 가장 후회스러운 일 한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투자의 정석을 모르는 상태로 주식과 펀드에 ‘묻지마 투자’했던거라고 말하겠어요. ▦전: 이런 얘기를 하면 내가 괜히 죄를 진 것 같고 마음이 무거워지는데 내가 경영학과 출신이라서…. 주식을 하라고 꼬드긴 장본인이 저거든요.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김: 태관씨가 ‘주식투자 해보라’고 했던게 15년 전인데 그 때는 수익이 좋았어요. 그 이후에 내가 잘난 척하고 내 마음대로 종목을 골랐어요. 그런데 전부 마이너스에요. 그래도 천만다행인게 한 보름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펀드를 마이너스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던져 버렸어요. 그 이후 많이 빠진 것을 보고 ‘그래도 늦었지만 손실을 감수한게 다행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죠. 지금 자꾸 말을 더듬잖아요? 아픔이 있어서 아까 처럼 말을 잘 못하고….(웃음) -어떤 분이 돈을 잘 쓰시고 어떤 분이 잘 모으시나요? ▦제가 시원하게 잘 쓰죠. 태관씨는 ‘안돼! 안돼!’하고 말리는 편이고. ▦전: 봄여름가을겨울이 법인에요. 경영학과를 나왔다고 재무관리는 내가 하지요. 이 친구는 통장을 죽어라고 안 봐요. 비밀번호 주고 보라고 해도 안 봐요. 들어가서 상태를 보면 돈이 얼마나 있는지 뻔히 알 수 있는데, 무조건 일을 벌이자고 해요. ▦김: 저는 공인인증서 같은 것 보는 게 골치 아프고요. 카드 보고, 숫자 보고, 자판 두드리고… 그런게 익숙지 않아요. -하지만 가수에게도 빵은 중요한 문제죠? ▦김: 제일 중요하지요. 악기 보다 빵이 더 중요해요. ▦전: 누구나 그렇지 않겠어요. -샐러리 맨인 제가 생각하기에 가수라는 직업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빵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는 직업 처럼 보입니다. 당사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 문제가 어떻게 다가 옵니까? ▦전: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요. 음악을 한 걸로 따지면 20년이 넘는데…. 우리 둘은 모두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으니까 함께 공부한 친구들은 대개 직장에 취직했어요. 지금 와서 친구들을 보면 자기 일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축복 받은 셈이지요. 하고 싶은 일을 했고, 그걸로 빵도 충분히 먹을 수 있었고요. 남들이 인정까지 해주니 진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가 글을 써서 하는 밥벌이가 뿌듯한 것 처럼 그들도 노래로 하는 밥벌이에 만족하는 듯 했다. -이번에 나온 음반 ‘아름답다 아름다워’가 8집이죠? 음반의 기획 의도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세요. ▦김: 데뷔 20주년 기념 음반이에요. 7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발표한 이후 6년이 지나서 새 음반 발표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20주년을 기념해서 특별하게 기획을 해보자고 해서 여러 가지 장르를 섞어서 연주 곡도 넣고, 기존의 음악 방식이었던 발라드, 펑크, 라틴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섞어서 내놓았어요. 중요한 건 대중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1년 열두 달을 의미하는 열두 명의 사람들과 사랑에 대한 인터뷰를 해서 이야기를 듣고 우리 음악에 녹여내는 그런 작업을 했다는 거예요. ▦전: 될 수 있으면 다양한 직업군을 골라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어요. 교수도 있고, 매니저, 사진작가, 건달, 사업가… 여러 사람을 인터뷰를 했어요. -20년 동안 음악을 해 오면서 변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 외모는 많이 변했고요. 속은 하나도 변치 않은 것 같아요. 기타의 숫자가 많아졌고, 변하지 않은 것은 통장 잔고? ▦전: 자기는 자기를 볼 수 없잖아요. 남들이 저를 보면 어딘가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시작은 혼자 했는데 가족이 생겼고, 아직 마음은 젊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성 팬의 비율이 높은 것 같은데 팬들은 두분 중 어느 분이 더 미남이라고 하나요? ▦김: 18년간은 계속 제가 주도권을 잡아 왔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2년 전에 이승신씨를 만난 후부터는 전태관씨의 저력이 살아나고 있어요.(웃음) 전태관씨, 대답이 없으니까 인정하는 거지요? ▦전: 본인이 말하는 것 하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르니까요(웃음).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10년전 일기’를 꺼내 노래를 들어봤어요. 10년 전에는 IMF였잖아요. 요새도 경제가 어려운데 가수로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김: 저희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내일의 태양은 떠올라요. 아마 요즘 ‘굉장히 힘들다. 죽겠다’고 말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에는 지금 보다 훨씬 더 힘들었어요. 지금 그때가 왜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다른 분들도 저희하고 똑 같은 생각일거에요. 아마 10년 후에는 오늘이 되돌아 가고 싶은 시간이 될 지도 몰라요. 여러분들도 오늘을 사랑하면서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전: IMF때 생각하면 굉장히 힘들었다는 생각들이 드실거예요. 주식 폭락하고, 부동산 폭락 하고…. 하지만 그때 누가 부동산, 주식시장에 활황이 올거라고 생각했겠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폭등, 주식 폭등으로 난리가 났었잖아요. 인생은 돌고 도는 것 같아요. 언제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또 다시 증시, 부동산 고삐가 풀려서 ‘억제해야 겠다’고 정책을 쏟아 놓고 하는 시절이 올거예요. 세상은 돌고 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김: 세계적으로 행복지수를 따져보면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 그 얘기는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냐’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얘긴데…. 힘들다고 생각될 때 음악을 듣다 보면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될 것 같아요. 인터뷰 앞뒤에 이 두 사내는 금융위기로 치달았던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에 관해 기자에게 이것 저것 물었다. 두 사람 모두 경제에 대한 인식이 상당해 보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경제 이야기를 하던 김종진은 휴대폰으로 받은 뉴스속보를 확인하기도 했다. 당대의 톱 밴드도 세상사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약력 ■본명 - 김종진 ■태어난 곳 - 서울 ■태어난 날 - 1962년 12월19일 ■형제 - 2형제중 막내 ■혈액형 - A형 ■학교 – 고려대 사학과 ■본명 - 전태관 ■태어난 곳 - 서울 ■태어난 날 - 1962년 5월16일 ■형제 - 3남1녀중 막내 ■혈액형 - 0형 ■학교 – 서강대 경영학과 ▶▶▶ 관련기사 ◀◀◀ ▶ 델리에서 보낸 편지 ▶ 인도 여행시 주의할 점 ▶ 고스톱 이제 그만 보드게임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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