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천연가스 공급가 할인 및 150억달러 규모의 국채매입 등 과감한 지원책에 합의하며 옛 소련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높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열어 우크라이나에 공급되는 천연가스 가격을 1,000㎥당 404달러에서 268.5달러로 약 33% 인하하고 국가복지펀드(국부펀드의 일종) 기금 150억달러를 우크라이나 국채에 투자하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합의에 아무 조건도 붙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러시아의 지원 덕분에 향후 1년반 동안 외채상환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과 러시아 주도의 옛 소련권 관세동맹 가입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러시아 쪽으로 기우는 모습이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당장 이번주 말까지 30억달러 상당의 우크라이나 국채를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번 합의로 천연가스 수입비용도 연간 20억달러 절감하면서 경상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8.5%에서 6%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지원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날 하루 우크라이나의 5년만기 CDS프리미엄은 2.14%포인트나 내린 829를 나타냈고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1%포인트 이상 떨어진 8.833%를 기록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재정적 지렛대를 확보하면서 영향력 면에서 EU와 미국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됐다.
또 러시아가 서방국가들에 맞서 국제무대에서 과거 소련에 버금가는 영향력 재건을 노리고 있어 이번 합의는 서방에 강한 경고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단번에 결정해낸 푸틴의 능력은 같은 수준의 구제금융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협상이 필요한 서방국가들과 비교된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가시적 이익에 비해 중장기적으로는 위험이 증대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EU와의 관계증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진영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것은 물론 단순 자금지원에 따른 착시현상으로 경제 체질개선의 계기를 놓칠 수 있다는 얘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의 지원책이 경기심리를 얼어붙게 하고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유럽비즈니스협회(EBA)의 성명을 소개하며 "(우크라이나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의 환영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이뿐만 아니라 만약 우크라이나 영토를 지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관리권을 양도하는 거래 등이 있었을 경우 단기적 이익 때문에 장기적 국익을 버렸다는 비난도 피하기 어렵다. 실제 반정부 진영은 이날 러시아의 지원책이 발표되자 3만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으며 양국 간 이면거래가 있었는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서방국가들도 이번 합의에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백악관은 "합의안이 시위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웃 국가가 EU와 러시아 중 양자택일하는 상황은 원하지 않는다"고 불쾌감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