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위기 최악상황 없다면 글로벌 침체로 가지 않고 작년같은 저성장 국면 지속
이머징국가간 교역 늘리고 내수 진작으로 대처 나서야
사회 불평등 완화하려면 상위층 끌어내리기보다 하위층 소득 높이기 필요
교육 확대·육아 지원 등 중장기 대책 마련 바람직
라구람 라잔(49ㆍ사진) 미국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제학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미리 예상해 '닥터 둠'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지난해에는 위기의 원인을 사회불평등에서 찾은 '폴트 라인(Fault line)'을 출간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기자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위치한 시카고대의 그의 연구실을 찾은 것은 2011년 12월21일. 고국인 인도의 총리 자문역인 그가 일주일간의 인도 출장을 다녀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라잔 교수는 '출장은 어땠느냐'는 의례적인 기자의 질문에 "다소 실망스러웠다"며 "인도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너무나 더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 연간 몇 %의 성장률을 손해보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인도는 현재 빈곤층을 어떤 방식으로 줄일지 고민하고 있다"며 "경제성장과 분배의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발전 단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와 불평등 해소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접점을 찾는 대목이었다.
라잔 교수는 사회 불평등 해소에는 왕도(王道)가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상위계층을 끌어내리기보다는 하위계층의 소득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빈곤층에 대한 기술훈련, 사회적 계층 이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확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려주는 육아지원 등 중장기적인 대책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2년 경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겠죠. 세계 경제는 세 가지 큰 이슈를 안고 있습니다. 유럽 위기, 미국 재정 문제, 중국의 경착륙 우려입니다. 여기에 20년 이상 된 일본의 문제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유럽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경기침체(recessionㆍ리세션)로는 빠지지 않고 2011년과 같은 저성장 국면 정도를 지속할 것으로 봅니다. 유럽도 일부 국가는 리세션에 들어가겠지만 다른 국가들은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세계가 19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직면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유럽은 리먼브라더스가 여러 개 있는 상황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식 대공황은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러나 이는 최악에 최악이 겹쳐야 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확률이 낮습니다. 유럽도 문제를 풀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로존 국가들의 채무위기 해법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유로존의 채무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단계의 해법이 필요합니다. 우선 위기를 맞은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을 치유해야 합니다. 구제금융을 제공할 수 있도록 독일이 주머니를 연다면 '패닉'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병의 근본원인을 치유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유럽중앙은행(ECB)이 각국의 구조개혁 약속을 받지 않고 채권을 사들인다면 시장은 ECB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유로 국가들의 채권을 덤핑 처분할 것입니다.
독일의 해법이 옳다고 봅니다. 결국 위기 국가들의 재정안정과 더불어 경쟁력 강화가 수반돼야 합니다. 그리스 상품을 독일이 살 수 있게 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실질임금의 하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해당 국가 국민들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머징 국가들도 성장둔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데요.
▦네.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수출주도형 국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떨어지느냐가 문제죠. 선진국들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하는 때입니다. 내수를 진작하고 이머징 국가 서로서로의 교역을 확대해야 합니다. 인도에서 성공한 한국 기업들이 모범사례입니다. 자동차ㆍ전자 등 한국 기업들은 다른 어느 나라 기업들보다 인도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습니다.
-중국 경제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주시죠.
▦내년 말 정권교체를 앞두고 현재의 중국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보다 건전한 경제를 물려줌으로써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이죠. 소프트랜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중국 경제는 그동안 대규모 투자와 수출로 경제를 이끌어왔지만 이제는 변해야 할 때입니다. 투자에서 소비, 수출에서 내수, 기업 이득에서 가계의 소득증가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금융 분야에 대한 규제완화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5~10년간 이뤄질 것입니다.
-미국으로 넘어가보죠.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기회복이 왜 이렇게 더딜까요.
▦가계ㆍ은행ㆍ정부 모두 과다한 빚에 짓눌려 있습니다. 디레버리징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죠. 과거처럼 빚을 내 소비하는 행태는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미국 경제의 가장 큰 과제인 일자리 문제는 구조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고 싶습니다. 미국 기업들이 시장을 찾아나가면서 국내 공장은 대거 문을 닫았습니다. 또 위기를 활용해 많은 인력들을 해고하고 새로운 기술로 노동력을 대체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어려웠을 법한 일들을 리세션을 통해 해치워버린 셈이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완화적인 통화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제로금리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작용이 큰 정책입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금리가 -5%가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웃음). 난센스입니다. 지금은 디플레이션 국면이 아닙니다. 그리고 금리가 아무리 낮아져도 기업의 투자나 가계의 소비는 늘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금리를 낮추기 위해 2차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장기금리는 오히려 올라갔습니다. FRB는 정책의 결과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정책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 미국ㆍ중국ㆍ프랑스ㆍ한국 등 세계 주요 국가에서 권력교체가 예정돼 있습니다. 정치적 대립이 당면한 경제적 과제 해결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습니다.
▦미국의 예에서 보듯 정치적 대립은 큰 문제입니다. 2012년에 선거를 앞두고 대립이 더욱 심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선거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기회가 됩니다. 가장 비근한 예가 스페인입니다(2011년 말 스페인은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56억달러의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 설사 미국에서 의회 다수당과 대통령이 다른 당에서 나오더라도 정치적 불확실성은 줄어들 것입니다. 향후 2~4년간 정치지형이 주어지게 되면 정치권은 타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선거 이전처럼 극심한 분열은 없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난 30여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신자유주의는 부분적으로만 옳았습니다. 단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만,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재정지출과 적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동안 각국의 정부는 능력범위 이상의 경제성장을 위해 과다한 지출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모순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ㆍ비정부기구ㆍ정부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민간은 일자리가 없고, 정부는 재원이 없을 때 양자가 합의해 민간섹터에서 인력을 고용해 공공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설정과 역할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셈이죠. 하지만 사회주의로의 회귀는 아닙니다.
-교수님의 저서 '폴트 라인'에서 소득 불평등을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셨습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이는 큰 문제인데요. 교수님의 해법은 무엇입니까.
▦최상위계층을 경제적으로 끌어내리기보다는 하위계층의 수준을 향상시켜 불평등을 완화해야 할 것입니다. 하위계층에 기술교육을 제공하고 청년층에 대한 직업교육의 기회 확대, 육아지원 등 중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위계층에 대한 세금부과는 노동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는 반면 정부의 재원확충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세계 영향력 1위 경제학자" 금융·경제위기 통찰 뛰어나 2011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경제학자 1위로 라구람 라잔 교수를 꼽았다. 이 조사에서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가 2위를,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4위를 차지하는 등 당대의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전공인 금융뿐 아니라 세계 경제가 맞고 있는 위기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력이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인도 보팔에서 태어난 그는 빈부격차, 정부 규제의 부작용 등을 체험했고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각국을 경험하면서 경제학자로서의 안목을 키웠다. 라잔 교수는 인도 델리 인도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아메다바드의 인도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라잔 교수는 경제발전과 금융기관들의 역할에 대해 주로 연구했고 2003~200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최연소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2003년에는 미국 금융협회로부터 금융이론 및 실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피셔블랙상'을 수상했다. 실물에 적극 관여하는 행동파 교수로서 인도 정부의 금융 부문 개혁위원회 회장으로 인도의 금융개혁을 주도했다. 현재도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경제자문역을 맡고 있다. 또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부즈앤코의 수석자문,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의 학술자문위원, 브라질 이타우우니방코의 국제자문위원 등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약력 ▦1963년 인도 ▦1985년 인도공대 전기공학학사 ▦1987년 인도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 ▦1991년 MIT 경제학박사 ▦1991년~현재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 ▦2003~2007년 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주요 저서:자본가로부터 자본주의 구출(2004년), 폴트 라인(2010년, 파이낸셜타임스 올해의 비즈니스북 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