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업체와 제조업체의 사이는 영원한 갑과 을의 관계에요." 최근 만난 한 제조업체 상품기획팀 관계자는 통신사와 단말 제조사의 관계를 이같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갑(甲)과 을(乙). 계약서에서 서로 상대방을 지칭하는 단어지만 지금은 한쪽이 절대 우위에 있다는 관용적 표현으로 흔히 사용된다.
국내 시장에서 통신사와 제조사가 갑을 관계라는 것은 사실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조차 신제품을 출시할 때는 통신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 휴대폰 제조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특정 업체 중심으로 쏠림 현상이 심화될수록 갑인 통신사의 위상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 같은 갑을 관계가 딱 한 번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애플 아이폰이다. KT가 아이폰을 국내에 단독으로 들여와 소위 '대박'을 친 후 애플은 통신사들의 러브콜 대상이 됐다. 애플은 이동통신 대리점에 단말기 장려금을 주지 않는다. 제품 판매와 관련된 모든 것이 통신사들이 떠안아야 할 몫이다.
반면 국내 제조사들은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대리점 장려금은 물론 통신사 비위 맞추기로 몸살을 앓는다. 제품 출시 시기가 통신사와의 협의 문제로 지연되는가 하면 보안을 유지해온 제품 정보가 통신사를 통해 유출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통신사들의 요구로 고객들이 사용하지도 않는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단말기에 의무 탑재해야 한다.
기존 제품의 떨이도 모두 제조사의 몫이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기존 제품 밀어내기를 위해 제조사들이 추가 장려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히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외국 업체의 경우 재고 처리를 위한 끼워팔기까지 강요받는다. 갑인 통신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비합리적인 단말기 유통과정 때문에 생긴 일이다. 정부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블랙리스트(단말기 자급) 제도까지 도입했지만 정착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갑과 을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갑과 을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여야 서로 발전할 수 있다. 갑과 을이 바뀔 수도 있다. 국내 단말기 유통시장이 하루빨리 합리적인 시장으로 바뀌길 기대해본다. 그래야 소비자들도 제품을 믿고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