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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자들이 근저당 설정비를 돌려달라며 은행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은 물론 2심에서도 줄줄이 패소를 당하고 있다. 소송 인원만 4만명으로 역대 최대 소송이라며 법조계와 금융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결과다. 하지만 최근 들어 법원의 분위기가 대출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고 있어서 결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9일 전국은행연합회와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이달까지 전국 법원에서 1심 판결이 난 150건 중 단 1건만 제외하고 모조리 은행이 이겼다. 2심 선고도 5건이 나왔는데 결과는 은행의 완승이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대출자 1명이 신한은행을 상대로 낸 130만원대 소액 사건에서 이긴 것이 첫 대출자 승소 사례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지난달 27일 2심에서 은행 승리로 뒤집혔다.
최근 법원 판결 추세는 '반은 대출자, 반은 은행 주장이 맞지만 결론은 은행 승'이다.
근저당 설정비 반환 소송의 쟁점은 계약서상 근저당 설정비용을 누가 낼 것인지 선택하도록 한 '부담선택조항(계약서 체크박스)'이 ▦약관규제법상 약관인지 아니면 개별약정인지 여부 ▦대출자가 근저당 설정비를 내도록 한 부담선택조항이 대출자에게 불리한 불공정 약관인지 여부다. 핵심은 대출자에게 선택권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대출자 측은 선택권이 없었던 만큼 개별약정으로 보기 어렵고, 은행이 내야 할 비용을 대출자에게 넘겼으므로 '불공정한 약관'이라고 주장한다. 또 대출관련 부대비용은 당연히 고객이 내는 것으로 은행이 설명하거나, 은행이 내도록 체크하면 가산금리를 붙였다고 강조한다.
은행은 은행 직원과 대출자가 개별적 합의를 한 뒤 이뤄진 것이어서 부담선택조항이 약관이 아닌 개별약정이며, 대출자가 비용을 내면 금리를 낮춰주는 이익을 제공했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법원은 "현실적으로 대출자에게 선택권이 없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무효가 될 수준은 아니다"고 보고 있다.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는 "비용 부담 주체를 3가지로만 정한 것은 고객의 선택권을 제한해 개별약정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계약서 체크박스가 '본인, 은행, 본인ㆍ은행 50%'로만 된 것이 형식적인 선택권만 인정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후 같은 법원에서 부담선택조항을 약관으로 봐야 한다는 대출자의 주장을 받아들인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는 지난달 30일 "대출자 중 상당수가 체크박스에 아무런 선택 표시를 하지 않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대출자가 은행 직원으로부터 개별적 교섭의 기회를 제공 받지 못했음을 추측케 한다"고 판시했다. 전날인 29일 민사합의31부는 "약관으로 인정하지 않을 경우 사업자들이 고객의 선택이라는 외관을 이용해 법 적용을 피해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처음부터 부담선택조항을 개별약정이라고 전제한 종전의 판결과 다른 모습이다. 근저당 설정비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한 변호사는 "법원이 형식논리에서 벗어나 계약 시 상황을 감안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실제 계약서를 증거로 낸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출자에게 선택권이 없었다고 해서 곧바로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일관된 판단이다. 또 근저당 설정비를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명확한 판례가 없는데다 현재는 은행이 근저당 설정비를 부담하는 점도 고려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 나온 2심 판결들은 여전히 부담선택조항을 개별약정으로 보고 있다.
승소를 장담하며 대규모 소송인원을 모집한 소비자단체들과 법무법인(로펌) 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대출자 8,000여명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처음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갈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소속 변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소송에 나선 법무법인 태산의 신용원 변호사는 "사실보다 법리적인 내용이 더 많아 판사들도 상급심에서 뒤집어질 것이란 우려를 하는 듯하다"며 "주로 법리적 판단을 내리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점차 법원의 시각이 대출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한 것도 주목할만한 점이다.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 윤종구 부장판사는 원고 패소 판결에서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한다"고 선고했다. 통상 소송에서 진 원고가 비용을 모두 떠안는 것에 비교해 이례적인 판단이었다. 윤 부장판사는 판결문 끝에 "최종 판결을 떠나 은행은 최근 급속하게 확산된 이익 극대화라는 명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ㆍ보완책을 제시해야 한다"며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고 종전 관행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인ㆍ주식회사가 있다면 언젠가는 소비자로부터 외면 받거나 법의 개입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주석을 덧붙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