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8월12일] 참근교대제
권홍우 편집위원
'처자식은 에도에 남겨둬라. 영주들도 해마다 통치자를 배알할 것.' 1635년 8월12일(음력 6월30일),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내린 참근교대(參勤交代ㆍ산킨코타이) 제도의 골자다. 목적은 두 가지. 지방영주인 다이묘(大名)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비용 지출을 유도, 지방세력의 경제력을 약화시키자는 의도다. 반란 예방책.
정권안보를 위해 도입한 참근교대제는 경제발전이라는 뜻하지 않은 효과를 낳았다. 당장 인질로 잡힌 처자식이 에도(도쿄의 옛 지명)에서 생활하는 데 돈이 들었다. 전국 각지의 다이묘 260여명이 영지에서 에도를 왕복하는 데는 더 많은 돈과 사회적 인프라까지 필요했다.
원칙적으로 반년은 에도에서, 나머지 반년은 영지에서 근무해야 하는 다이묘가 움직일 때 수행원은 평균 100~150명선. 수행원 2,775명을 데리고 다녔던 다이묘도 있었다. 일본 서남단에서 에도까지 걸린 시간은 왕복 100일. 다이묘 행렬이 길에서 먹고 자면서 뿌리는 돈으로 유통경제가 싹텄다. 5대 간선도로망인 고카이도(五街道)가 완비되고 요즘도 주식시장에서 쓰이는 일봉 차트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상업의 번성으로 에도 인구는 100만명선을 넘어섰다. 전체의 도시인구 비율도 5~7%로 높아졌다. 런던 인구가 70만명, 유럽의 도시인구 비율이 2% 남짓한 시절이다. 다이묘에게 돈을 빌려준 상인들은 거대 금융업자로 떠올라 '오사카 상인이 화를 내면 전국의 다이묘들이 떤다'는 말도 생겼다.
오늘날 일본의 복잡한 국내 유통구조와 상업금융자본이 형성된 것도 이때부터다. 참근교대의 결과물인 도로망 확충과 인력의 이동, 유통의 활성화가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의 속 모양새를 상인의 나라로 변화시킨 셈이다.
입력시간 : 2006/08/11 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