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5년이 다 됐지만 세계경제는 아직도 침체국면에 있다. 급성장하는 개도국들과 성장 동력을 상실한 선진국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글로벌 불균형은 여전히 금융시장의 불안요인이다. 그렇다 보니 조그만 충격에도 세계경제는 요동을 친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미국 경기의 회복이라는 긍정적인 신호임에도 동남아시아 개도국의 외환시장은 충격에 빠진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하버드대학 마이클 스펜스 교수는 '넥스트 컨버전스(the Next Convergence)'에서 이러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개도국과 선진국은 성장을 통해 공진하고 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중국ㆍ인도ㆍ한국 등의 신흥강대국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도래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가능성을 높이 봐준 것에는 감사하나 지금 우리 경제의 모습을 보면 턱도 없는 소리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한 세대 전에 우리의 선배들이 땀 흘려 가꾸어 놓은 것이다. 지칠 줄 모르던 기업가, 근면한 국민, 미래를 내다본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지금의 경쟁력 있는 제조업 기반과 수출시장임을 알아야 한다.
스펜스 교수가 간과한 우리의 문제는 한국경제의 조로(早老)화다. 미처 선진국에 들기도 전에 성장 동력이 꺼지고 있다. 선진국이 된 듯한 착각이 근로의식을 떨어뜨리고 땀 흘리는 현장을 외면하게 한다. 손쉽게 돈을 버는 서비스업에 사람이 몰리고 제조업 현장에 인력은 모자란다. 결국 숙련도는 떨어지고 인건비는 높아진다. 여기에 강성노조까지 결합해 제조업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압축 성장하는 동안 선진국의 핵심인 사회적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투명ㆍ정직ㆍ성실 등의 단어가 경제주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점도 우리의 약점이다. 게다가 기업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반시장적 규제를 양산해 기업가의 사기를 저하시킬 뿐 아니라 차세대 기업가의 출현마저 가로막고 있는 점이다.
우리 경제는 3년 연속 잠재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이기를 바라지만 내버려두면 일본 꼴이 나지 말란 법이 없다. 디플레이션이 20년이나 이어질 줄 누가 예측했겠는가. 인구구조가 급속히 노령화되고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고 고정자산 투자가 줄어드는 모습이 흡사 1990년대 초의 일본과 닮아 걱정이다. 지난주 청와대서 열린 10대그룹 회장과의 간담회에서 경제활성화를 위한 논의가 있었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한 병이라는 점이다. 기업들의 투자를 독려해 일자리를 만들고 성장률을 좀 높이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다. 경제운용시스템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한국의 생산가능 인구는 2016년을 정점으로 하락이 예상돼 악화되는 인구구조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노사 간 대협약이라도 만들어 기업생태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지금 국제사회는 기업생태계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조차도 기업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자녀들이 먹고살 차세대산업의 씨를 지금 뿌려야 한다. 문제는 누가 눈앞의 일자리 만들기와 경제민주화 공약에 발목 잡혀 있는 정책의 방향을 틀 것인가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시 왜구에 쫓겨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려 할 때, "불가합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卽朝鮮非我有也)"라고 목숨을 걸고 진언했다. 지금은 누가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라고 외칠 것인가. 장기침체의 길로 들어선 한국호의 방향을 돌릴 류성룡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