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서도 확인됐듯이 우리 사회 이념논쟁의 핵심에는 북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새누리당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제기하고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해 안보 불안감을 조성하자 다수 민심은 변화보다 안정을 선택했다.
남과 북에 새 지도부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서 발생했거나 악화된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천안함ㆍ연평도 사태, 핵실험과 핵능력 향상, 장거리 로켓 발사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조건 없는 대화로 사과 받아내길
박근혜 당선인의 대북정책 키워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압박정책이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유화 아니면 강경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대북정책을 추진하겠다" "대화에 전제조건이 없고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면 김정은도 만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공약은 '북한이 신뢰를 보인다면'이라는 조건부에 가까워 악화할 대로 악화한 지금의 남북관계에서 조건 없는 대화가 이뤄져 신뢰를 쌓기는 쉽지 않다. 대화가 이뤄지려면 천안함 폭침으로 취해진 지난 5ㆍ24 대북제재 조치를 해제해야 하는데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없이는 제재를 풀 수 없다는 것이 당선인 측 입장이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을 부인해온 북한이 박근혜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이 제재하에서는 대화에 응할 수 없다고 버틸 경우 남북관계 복원은 상당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로 유엔 차원의 추가 제재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제재를 먼저 풀기도 쉽지 않다. 조건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제재를 풀고 대화를 통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 당선인은 안보와 억지력을 중시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ㆍ개방ㆍ3000(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하면 10년 안에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한다는 구상)'과 다르지 않다는 우려에 대해 당선인 측은 비핵화 진전 이전이라도 교류협력을 확대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북한은 남측에 새 정부가 출범하면 의례적으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시험해본다. 기선잡기 차원의 기싸움으로 역대 정부들은 관계 설정에 1~2년을 보냈다. 이명박 정부는 6ㆍ15 공동선언과 10ㆍ4선언 이행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지속하다 관계 설정도 못하고 임기를 마치게 됐다.
신뢰 베풀고 기존 합의 존중해야
통일시대를 열어가는데 있어 새 정부의 역사적 사명은 막중하다. 북한을 화해협력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흡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던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관계는 민족 내부 간 특수관계를 넘어 국가 간 관계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정규 무력을 동원한 북한의 도발은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고 적대의식을 강화시켰다.
새 정부 집권 초기에 관계복원을 하지 못할 경우 남과 북은 분단된 2개의 주권국가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루빨리 관계복원을 모색하려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북이 먼저 신뢰를 보일 것을 요구하기에 앞서 남이 먼저 신뢰를 베푸는 아량도 있어야 교착국면에 빠진 남북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 당선인이 남북관계에서도 첫 단추를 잘 꿰려면 공약대로 남북 간 기존 합의를 존중하고 대화를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고유환 북한연구학회장ㆍ동국대 북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