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외환위기의 잔영

[데스크 칼럼] 외환위기의 잔영 이용웅 yyong@sed.co.kr 관련기사 • '외환위기 그후 10년' 시리즈 전체보기 • "단순 위기" 치부…경제개혁 칼날 무뎌져 • 99년 DJ '환란 끝났다' 발언에 깜짝 • 정치 공약에 멍드는 경제 소설가 이병주씨는 구한말 파란만장한 시대상을 담은 대하 장편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를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나라의 불행은 시인의 행이런가, 창상(滄桑)을 읊은 시 구절 절묘하니라’(國家不幸詩人幸 賦到滄句便工). 청나라 때 사람 조익이 금나라 때 시인 원호문에 대해 쓴 글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중국 북부를 120년간 지배하다가 몽골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나라이다. 원호문은 몽골의 연이은 공격으로 패망의 구렁텅이에 내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망국의 한을 시로 읊어 중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IMF 10년차 여전한 위기 조익은 금나라의 멸망이 원호문이라는 대천재를 탄생시켰다는 역설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라의 불행이 시인에게는 행운이 되었다”는 평을 쓴 것이다. 이병주가 이 구절에서 소설을 시작하는 이유는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앞서 우리나라에도 원호문과 같은 시인이 있는지 찾기 위한 작업이었다. 작가는 불행히도 원호문과 비견할 만한 수준에 이른 시인은 찾기 힘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금나라는 여진족 나라였는데도 한족 출신인 원호문이 망국을 애달아하면서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후벼내는 시를 쏟아냈지만 수많은 선비를 키웠다고 자부하는 조선이 망하는 순간에 원호문에 비견할 만한 시인을 얻지 못했다는 점은 망국 못지않게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게 내년이면 10년이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선진국 클럽에 들어갔다는 축배를 마신 지 1년 만에 우리나라는 한국전쟁과 비견될 만큼 충격적이고 비극적이었다는 외환위기에 내몰렸다.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졌고 모래알처럼 많은 수의 가장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물론 그들이 이끌던 식솔들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다”는 자부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엽전은 뭘 해도 안된다”는 패배자적 인식이 온 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푸른 눈의 서구인들이 다시 한 번 한국인의 머리 위에서 위세를 부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시 ‘위기’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대목이다. 사회가 한바탕 큰 소동을 겪은 뒤에는 원호문 같은 대천재는 아니더라도 시대상황을 담은 예술 작품이 하나 정도는 형상화돼 후대의 귀감이 되게 마련이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그와 같은 작품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감명 깊은 예술적 체험을 한 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찌 문학 등 예술 작품뿐이겠는가. 이경식 전 한국은행 총재는 “환란의 주범으로 욕을 많이 먹었지만 외환위기와 관련된 권위 있는 백서가 나와 차분하게 평가가 이뤄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직도 우리 귀에 익숙한 강경식 전 부총리, 이경식 전 한은 총재, 김인호 청와대경제수석 등 이른바 ‘환란주범 3인방’만 책임을 뒤집어쓴 덕택에 나머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구할 수 있었다면 나름대로 그들의 역할이 큰 것 같기도 하다. '말의 성찬' 보다 진정한 반성을 하지만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새를 보인다면 우리 모두 자세를 고쳐 잡아야 할 것이다. 장기간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길거리에 내몰린 개와 고양이들까지 고생이 심하다는 소식이고 보면 이른바 ‘대권’이라는 허울 좋은 권력을 찾아 나라를 다시 쪼개고 있는 정치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아직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 반성보다는 ‘말의 성찬’만이 난무하는 것을 보는 경험도 참으로 기이하다. 큰 위기를 겪은 사람들의 진지한 반성이 10년째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그런식으로 아까운 시간을 때우기만 한다면 혹여 원호문과 같은 망국의 시인이 등장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아주 조금은 드는 것이다. 입력시간 : 2006/12/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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