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31.너무나 들어보고 싶었던 말

어느 날 저녁 나는 어머니한테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나 천환만 주이소.” 당시 천환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천환? 천환이 어디 있노.” 어머니는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듯 잘라 말하셨다. “책 살깁니더. 나도 공부 좀 해야겠심더.” “야야 그만두거래이. 우리 형편에 공부는 무신 공부가.” 어머님의 말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집안 형편상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 때 어머니는 내가 그냥 한번 해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돈을 마련해 주셨다. 다음날 대구로 가서 종합 고교 입시책을 샀다. 그리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책을 펴 들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지만 읽고 또 읽으면 웬만한 과목은 혼자서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영어와 수학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마을에서 대학에 다니는 형을 찾아가 귀찮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만 보내 주이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겠심더. 고등학교만 보내 주면 집에 신세 지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겠심더.” 입시가 다가오자 나는 마지막 시험준비를 하면서 어머니와 형에게 이렇게 안심을 시켰다.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셨고 작은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안 형편으로 위로 두 형은 제대로 공부를 시키지 못한 마당에 한 아이만 학교에 보낸다는 것 자체가 난감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거의 막무가내로 우겨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배움의 길은 텄으나 통학길은 고역이었다. 새벽같이 읍내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등교하노라면 교복을 아무리 잘 다려 입어도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단추 한 두 개쯤 떨어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 어려운 일은 왕복 교통비를 감당하는 것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가난한 농가에 단돈 얼마라도 매일매일 주기에는 버거웠다. 생각다 못해 큰형을 졸라 값싼 자전거 한 대를 마련했다. 요즘이야 길이 좋아 자전거 타는 맛도 있지만 당시 자전거 통학은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것보다 몇 배 힘들었다. 집 앞 개울은 언제나 자전거를 들고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고 울퉁불퉁한 자갈길 30여 리를 달려 학교에 갔다 돌아오고 나면 팔다리가 아프고 온 몸은 파김치가 되곤 했다. 툭하면 체인이 벗겨져 양손은 기름투성이가 되기 일쑤였고 펑크라도 나면 타고 가기도 수월찮은 길을 자전거를 어깨에 멜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비가 오면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그러나 통학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어머니와 형에 대한 심적인 부담감이었다. 날만 새면 농사일에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혼자 교복을 차려 입고 학교에 가는 일이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 때가 돼도 눈치가 보여 공부만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소리는 "공부 좀 해라. 공부 않고 뭐하노"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1년 동안 매일같이 70리길 자전거를 타다 보니 나 자신도 모르는 새 팔다리가 탄탄하게 단련되어 누구와 팔씨름을 해도 지는 적이 거의 없었다. 2학년 때부터는 학교 근처에서 친구와 자취를 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니 초등학교 아이들 몇을 모아 공부를 봐줄 수도 있었고 작지만 그 노력으로 받는 돈은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호기심이 남달랐던 나는 사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틈나는 대로 자취방 가까이 있던 사진관에 가서 심부름을 해주며 사진을 찍고 현상ㆍ인화하는 기술을 배웠다. 나중에는 조금씩 모은 돈으로 낡은 카메라를 사서 마을에 결혼이나 회갑 잔치가 있으면 사진사가 되어 기념사진을 찍어 주고 사진관에 가서 원하는 크기로 인화해 주기도 했다. <조충제기자 cjch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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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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