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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복판,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경복궁의 정문. 15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광화문은 역사적 상징이자 민족적 자긍심 그 자체다. 지난 2006년 12월 복원작업이 시작된 지 3년 8개월 만에 고종이 중건한 1865년 당시 모습을 기준으로 제 모습을 되찾았다.
◇615년 영욕의 역사=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5년 경복궁의 남쪽 정문을 세울 당시의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으나 훗날 세종대왕이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라는 뜻의 ‘광화문’으로 개명했다. 대표적인 조선의 왕궁 건축물로 위엄을 드높이던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첫 시련을 겪는다. 선조가 왜군을 피해 피난을 갈 때 궁궐 창고를 노린 백성들이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에 불을 질러 광화문이 소실된 것. 전쟁은 끝났으나 무려 270년이나 광화문은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국가 재정이 부족했던 탓이다.
광화문은 조선 말기 고종 즉위와 함께 ‘재건’된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1865년부터 경복궁 재건과 함께 광화문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광화문은 단순한 문을 넘어 왕실의 권위와 역사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헐리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 등 학자들의 반대로 위기는 피했지만 1927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의 시야를 터준다는 이유로 광화문의 위치를 옮기고 방향도 4도가량 틀어놓았다.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한국전쟁의 포화로 이마저 타버린 채 석축 기단만 간신히 남았다.
대한민국이 안정과 성장궤도로 진입하자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을 추진했다. 하지만 원래 정확한 위치보다 14m나 뒤로 물러났고 축의 방향도 여전히 틀어진 채였다. 목재를 구하지 못해 콘크리트로 목조 건물을 흉내냈고 박 전 대통령 친필의 한글 현판이 걸렸다.
◇어떻게 복원했나=1865년 고종 당시의 중건 모습을 되살리고자 시작된 4년여의 복원 대장정은 무형 문화재인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이 지휘를 맡았다. 기둥과 보를 만드는 데 150년 된 삼척의 금강송 10그루, 추녀 등의 부재로 금강송 26그루까지 3.6m짜리 목재만 약 21만재가 들었다. 8톤 트럭으로 100대 분량이라고 한다. 기와는 2만6,000여장, 석재 2,300여개가 투입됐다. 투입된 사업비는 280억여원.
위치는 기존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이동했으며 일제 때 비뚤어진 각도(3.75도)도 이번에 바로 잡았다. 이로써 광화문은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ㆍ문과 정확히 평행을 이루게 됐다. 현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글씨에서 고종 당시의 한자 현판으로 바뀌었다.
광화문의 서까래(椽木)는 일제 당시 잘못된 실측으로 1968년 복원 때 15㎝로 얇아진 것을 21 ㎝로 바로잡아 비례를 맞췄다. 지붕과 처마를 떠받치는 서까래가 커져 문루(門樓)는 안정감을 되찾았다.
◇홍예문과 각종 장식, 관람 포인트=개문식과 함께 15일 시민들에게 활짝 열린 홍예문은 광화문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다. 아래 석축에 3개의 문이 있는 모습은 건축사에서 드문 형태일 뿐 아니라 서양의 고딕 성당에 비견할 만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붉은빛으로 칠한 문을 열면 천정에는 봉황과 현무, 기린이 한 쌍씩 그려져 있다. 세 문 중 가운데 문은 과거 임금만 드나들 수 있었던 문이다. 광화문 앞ㆍ뒷면의 빗물받이는 용머리와 연꽃 모양으로 각각 만들어졌고 담장에는 해ㆍ달과 8괘가 그려졌다.
지붕 위쪽으로는 ‘망새’라 불리는 취두(鷲頭)가 있다. 화재를 막고자 궁궐이나 전각 지붕 위에 놓은 장식물로 기존 광화문 해체 공사 때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해체했을 만큼 상징적 의미가 크다. 복원 공사기간에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해치’도 되돌아왔다. 해치는 화재를 막아준다는 속설이 있는 영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