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입이 부르트도록 호소할 때는 들은 척은 안하고 콧방귀만 뀌더니…』지난달 10월21일 한·미 자동차협상 결과를 전해들은 자동차업체의 한 중역이 내뱉은 말이다. 업계의 애로사항을 건의할 때는 『뭐 그런 것까지 정부가 나서서 할 일이냐』며 묵살하던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기업들이 애간장이 타도록 부탁했던 「소원수리」가 일거에 해소된데 따른 비아냥이다.
정부는 우리 자동차업체들이 불경기를 이유로 세율인하 등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모르는체 외면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통상압력이 들어오면 제도를 바꾼다며 부리나케 움직이는 양면성을 보여왔다. 외국업체들의 압박에는 유약하고 국내기업들의 청원에는 강한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정부」의 단면이다.
세율인하와 저당권제도 도입은 경기가 주저앉기 시작한 지난 96년 이래 우리 자동차업체들의 숙원이었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같은 소원을 이루었지만 그다지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니다.
『또 한번 미국의 힘을 빌려 소원을 관철시킨 셈이다. 어차피 개선될 문제라면 우리가 요청했을 때 풀어줘야 했다. 어느 나라 정부인지 의심스럽다.』(모자동차회사 K이사)
자동차업체들은 올들어 내수판매가 예년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지자 온갖 명목으로 부과되는 자동차세금을 내려달라고 청와대, 재정경제부 등에 요청해왔다. 우리나라의 자동차관련 세율은 미국의 5.6배, 일본의 1.6배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업들은 『세금을 내려줘야 가격을 인하함으로써 죽은 소비를 되살리게 할 수 있다』며 정부부처에 읍소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업계의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에 그쳐왔다. 특소세의 한시적 인하 등이 고작이었다. 재경부는 99년 7월까지 1년간 30%의 특소세를 감면하는 선에서 기업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기업들은 『1년동안의 한시감면은 효과가 적으니 2000년까지만이라도 연장해달라』고 통사정했다. 물론 이에대한 재경부의 답변은 「수용불가」였다.
그러나 한·미협상 타결 결과, 특소세 감면조치는 2005년까지 연장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내기업들이 아무리 매달리고 호소를 해도 이뤄지지 않는 일이 미국의 힘앞에서는 단칼에 성사되고 만 것이다.
5대그룹 이하 중견기업에 대한 무역금융 지원결정도 비슷한 양상이다. 재경부는 산업자원부와 기업들이 무역금융 지원을 주장하자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합의사항에 어긋난다』며 눈치를 보면서 버티다가 IMF가 『한국 정부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반응하자 뒤늦게 무역금융을 허용하기로 했다.
세제를 보면 정부가 우리 기업을 보호하는데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맥주의 주세가 130%인데 비해 위스키는 100%로 오히려 세율이 낮다. 유럽 등 외국과의 통상마찰을 회피하기 위한 정부의 「눈치보기 정책」 탓이다. 모 주류업체 관계자는 『맥주가 이미 서민들의 술로 자리잡은 지가 오래인데, 고율의 세금을 매기고 고급술에는 이보다 낮게 세금을 매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일부 고급가전제품에 매겨지는 특별소비세의 과세기준의 경우 국산보다 외제수입품에 유리하게 돼 있어 국산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도 개선해야 할 과제지만 우리 정부는 어쩐 일인지 이같은 업계의 의견을 묵살하고 있다.
대형 컬러TV 등에 매기는 특소세의 경우 국산품은 제조원가에 광고비를 비롯한 판매관리비, 생산자 이윤 등이 포함된 공장도가격을 기준으로 특소세가 부과되고 있다. 반면 수입제품은 판매관리비 등이 제외된 통관가격을 기준으로 부과, 세금면에서 국산품이 외국제품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 더구나 국산품의 특소세가 외제보다 높아지면서 교육세와 부가가치세도 덩달아 뛰기 때문에 최종 판매단계에서는 국산품 가격이 외제에 비해 9% 가량 더 비싸게 매겨지고 있다.
외제품의 판매관리비와 유통마진이 국산품과 동일하다고 할 경우 특소세가 5%인 국산컬러TV는 매출원가의 58%에 이르는 판매관리비와 16%에 달하는 생산자이윤을 합쳐 특소세를 매기는 반면 외제품은 매출원가와 수입상이윤이 제외된 통관가격만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국산품이 외제에 비해 6%가량 경쟁력이 떨어진다. 냉장고 역시 이런 계산방법을 적용하면 국산품이 외제보다 7%가량 비싸다. 승용차는 5%, 에어컨은 9%정도의 가격경쟁력 하락요인을 부담하고 있다.
기업들은 『지금까지는 국산에 비해 가격이 크게 높은 고급제품이 주로 수입돼 상대적 불이익이 표면화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국산품과 비슷한 제품이 수입될 경우 이같은 문제점이 국산품의 경쟁력을 안방에서도 잃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외유내강」의 모습을 보이다보니 이를 악용하는 기업도 있었다. 한보그룹은 지난 96년 러시아 이르쿠츠크 가스전개발 사업을 위해 정부에 사업신고서를 제출했다가 정부가 이를 불허할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 경제부총리를 통해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한보는 러시아 경제담당 부총리를 동원, 재경원장관에게 『한보의 사업을 빨리 승인하지 않을 경우 계약을 재검토하겠다』는 내용의 친필서한을 보내도록 했다. 정부가 바짝 긴장하면서 사업에 대한 결정이 늦춰진 것은 물론이다.
LG경제연구원의 강태욱(姜泰旭) 선임연구원은 『우리 기업들에 대한 공무원들의 불신과 몰이해가 산업현장과 정책의 괴리를 심화시키고 있다』면서 『금융이나 세제관련 부처들도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전향적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