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8일] 만주사변


1931년 9월18일 밤10시, 만주 봉천 외곽 유조구(柳條溝ㆍ류타오거우). 일본 특수부대원들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했다. 피해는 적었다. 파손된 철로 길이는 불과 수십㎝. 몇분 뒤 급행열차가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기 재산인 철도를 약간 흠집 낸 일본은 중국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인 뒤 ‘군사적 보복’에 나섰다. 만주 전역이 100만 관동군에 휩쓸렸다. 철로 폭파는 침략의 구실을 찾기 위한 위장된 자해 공갈이었던 셈이다.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유는 두 가지. 특유의 호전성과 경제적 이해타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과 전쟁을 통해 세계적 불황에서 벗어나자는 재계의 계산이 맞물렸다.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금본위제도를 확립할 재원을 마련하고 1차대전 승전에 따른 호경기를 경험해 ‘전쟁=활황’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던 터. 일본 학자들은 ‘만몽(만주ㆍ몽골)을 얻으면 실업자 구제와 불황 타개, 식량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며 전쟁을 부추겼다.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일제에 협력했던 아버지 장작림과 달리 장개석의 국민당에 합류하고 민족자본을 동원해 일본이 건설한 만주철도를 포위하는 형태의 철도노선을 추진한 점도 사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만주사변은 동북아 역사의 흐름을 갈랐다. 전쟁 결과물인 만주국의 경제를 담당한 인맥은 전후 일본의 관주도형 경제를 이끌었다. 한국의 60, 70년대 경제개발의 주역도 만군 인맥과 만주국 관료 출신들로 메워졌다. 만주사변의 그늘은 더 이어질 것 같다. 일본 만주인맥의 대표격이자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한일국교정상화의 배후 인물인 기시 노부스케 전수상이 일본의 차기 총리 후보 0순위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의 외할아버지이자 정치적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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