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靑羊)의 해, 을미년이 힘차게 밝았다. 건강하고 행복한 일이 가득한 새해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불과 1세기 전인 1895년의 을미년은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한 해였다. 그해 4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10월에는 을미사변이 발발해 명성황후가 피살됐다. 무엇 하나 스스로 풀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했다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보통신기술(ICT)로 미래를 바꾸는 힘을 키워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선도하는 힘이 ICT에 있고 한국은 명실공히 ICT 강국으로 올라섰다. ICT인들은 새해 벽두부터 열리는 전시회로 쉴 틈이 없다. 당장 6일부터 미국에서 소비자가전쇼(CES)가 열린다. 3월에는 스페인에서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가 개최된다. 이 두 전시회는 매년 그해의 ICT 트렌드를 보여준다. 사실 CES는 소비자가전 전시회지만 가전보다는 융합기술이 더 주목을 받는다.
올해 역시 전시회를 통해 키워드가 나왔다. 지난해를 뜨겁게 달궜던 사물인터넷(IoT)과 스마트카·웨어러블이 올해도 이슈로 선정됐다. 다만 IoT는 사물 간 연결을 넘어 지능까지 연결되는 시대를 예고하고 IoT와 관련된 운영체제(OS) 또한 주목했다. 스마트카는 자율주행 단계로 넘어갔고 웨어러블은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역시 올해 주목할 7대 기술을 선정했다. 미래 예측에 한몫 거든 셈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근간을 혁신할 3건의 컴퓨팅기술과 미래 ICT융합 부문에서 새로운 생태계의 얼개를 결정할 2건의 플랫폼, 인간에 가까운 2건의 기계장치 등 7가지 기술을 꼽았다. 컴퓨팅 분야는 시각 등 오감·체온·땀과 같은 생체신호나 인간의 감정을 읽어내는 감성컴퓨팅이 눈에 띈다. 더불어 양자역학을 사용해 컴퓨터를 만드는 양자컴퓨팅, 인간의 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기존 전통적 전자계산기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뉴로모픽(Neuromorphic) 컴퓨팅 등이 주목을 받았다.
플랫폼 분야도 차세대 모바일과 지능화 플랫폼의 발전을 예상했다. IoT 발전에 따라 IoT 플랫폼과 다양한 로봇의 등장으로 중요하게 될 로봇플랫폼도 관심을 둘 만하다. 인간의 시각과 인지능력을 뛰어넘는 머신비전, 생각만으로 로봇 의수를 조작할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 머신도 중요 이슈다.
ICT는 그동안 인간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슈퍼컴퓨터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선거결과를 미리 분석하고 예측해줄 뿐만 아니라, 피 한 방울로 암 발병 여부를 예측할 수 있고 유전자 분석을 통해 암에 걸릴 확률도 계산해준다.
그러나 급변하는 ICT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변화를 쫓아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CES와 MWC 모두 올해의 주제로 '혁신'을 선택했다. CES 2015는 '혁신의 글로벌 무대', MWC 2015는 '혁신의 최전선'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아픈 역사처럼 혁신의 뒤안길로 밀려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들린다.
조선말 쇠하는 국운과 함께했던 조상의 삶이 애달프게만 느껴진다. 1세기 전 조상들에게 슈퍼컴퓨터 한 대를 선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 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까. 슈퍼컴퓨터가 없더라도 세상을 한발 앞서 보려는 의지와 통찰력만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혁신의 힘은 혁신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에서 나온다. 오늘날 전시회의 시류를 놓치지 않고 주목할 만한 ICT 기술을 선정하며 미래를 바꾸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김흥남 ETRI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