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정책발표로 시장에 불필요한 혼선을 초래하는가 하면, 직제개편을 둘러싸고 위원장 퇴진운동이 벌어지는 등 내홍을 겪고 있다. 일사불란한 일처리와 조직관리를 주무기로 내세워 온 금감위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그동안 금감위와 금감원은 이헌재(李憲宰)위원장 특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특수조직 형태로 운영되어 왔다』며 『하지만 1단계 구조조정이 마무리단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구조적 과도기에 따른 조직이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정책보다 말이 앞선다 = 치밀한 정책집행에 앞서 먼저 말을 내세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생보사 상장을 둘러싼 금감위의 어설픈 대응은 그 대표적인 사례.
이헌재 위원장은 지난 6월30일 『삼성생명 상장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해 89년 이후 10년을 끌어온 생보사 상장문제를 연내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같은 발표는 삼성자동차 법정관리 발표와 맞물리면서 특혜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李위원장은 최근들어서도 생보사 상장안을 연내 반드시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밝혔지만 해당업계와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결국 해를 넘기게 됐다. 10년 넘게 끌어온 해묵은 과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대우 해외채권단 처리도 유사하다. 금감위는 해외채권단이 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법정관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론을 내세워 연내타결 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이 위원장은 최근까지도 『다음주면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해외채권단은 조건 수용을 거부했고 금감위는 결국 법정관리 결정을 연기하는 선에서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섣부른 발표로 인한 혼선 = 이헌재 위원장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장에서 서민금융기관인 신협, 새마을금고에 한해 예외적으로 대우채권이 편입된 수익증권의 중도환매를 허용해 줄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다른 금융기관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뒤늦게 『이는 증권사와 투신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시장자율론을 들어 무마에 나섰다.
최근 시장의 핫이슈로 부상한 37개 퇴출기업 논란도 섣부른 발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금감원은 지난 27일 현재 법정관리와 화의절차가 진행중인 부실계열 78개 기업 가운데 37개사가 내년 상반기중 조기퇴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마치 퇴출대상이 확정된 것처럼 언론에 보도됐고 시장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언론사에는 퇴출대상을 확인해달라는 문의가 빗발쳤다.
문제는 금감원이 이같은 파장을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책임있는 정부가 퇴출대상을 운운할 경우 시장에 미치는 파급은 불을 보듯 뻔한데도 「명단만 공개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안이한 판단에 빠졌던 것이다. 또 등급을 산정한 평가기준이 96년에서 98년도 재무제표인만큼 그 이후의 재무구조 개선정도에 따라 퇴출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다.
정부 당국의 섣부른 발표가 시장에 얼마나 큰 파장을 주는지 이번 기회에 새삼 확인한 셈이다.
◇조직간 내홍의 이면 = 금감위의 행정실 확대 움직임에 대해 금감원이 반발하는 등 그동안 수면하에 있던 조직간 내홍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금감원 노조는 『당초 10명 내외의 인원으로 단순 행정보조업무만 하도록 했던 행정실이 4차례의 조직개편을 거쳐 결국 3개국(局)을 거느린 금융부로 확대됐다』며 『공무원 자리 만들기에 앞장선 이헌재 위원장에 대한 퇴진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의 또다른 관계자는 『장관급 공무원이 민간 감독기관의 장을 맡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 『IMF 위기가 어느정도 수습된만큼 감독기구로서 금감원과 금감위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범 2년째를 맞는 금감위와 금감원이 이같은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이종석기자JS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