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8월 22일 서울고등법원은 엔터테인먼트업계와 법조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판결을 내놓았다. 유명인의 사진과 이름 등을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인 퍼블리시티권을 2심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퍼블리시티권은 미국, 일본 등에선 일반화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규정한 법이 없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해당 소송은 배우 신은경씨가 "한의원이 사진과 이름 등을 허락 없이 홍보에 사용해 초상권과 퍼블리시티권을 침해당했다"며 고소한 사건이었다. 재판부는 "퍼블리시티권이 규정된 법은 없지만 광고업 등 관련업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어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불법행위로 봐야 한다"며 퍼블리시티권 침해를 인정했다.
업계는 이 판결을 계기로 퍼블리시티권이 널리 인정돼 유명인의 이름과 사진 등을 상업적으로 도용하는 행태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후 법원 판결은 업계의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퍼블리시티권을 부정하는 판결이 오히려 더 많아진 것이다.
3일 서울경제신문이 대법원 판결검색 시스템을 통해 분석한 결과 2013년 퍼블리시티권 인정 여부를 다퉜던 31건의 판결 가운데 해당 권리가 인정된 경우는 16건(51.6%)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엔 관련 판결 34건 가운데 4건(11.8%)만이 퍼블리시티권을 인정받았고 올해 상반기엔 관련 판결 9건에서 모두 퍼블리시티권이 부정됐다.
한의원이 가수 유이의 사진을 도용해 '유이 꿀벅지로 거듭나세요'라고 광고한 사례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수지 모자'라고 이름 붙여 모자를 판매에서 사례, 가수 싸이를 흉내 내는 인형을 판매한 사례 등에서 법원은 모두 퍼블리시권을 부정했다.
그동안 퍼블리시티권 인정 여부를 두고 법원 판결이 엇갈린다는 지적이 이어졌지만 지난해 이후 판결 경향은 '일관된 부정'인 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관련법이 없는 상태에서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는 건 무리라는 공감대가 법원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지 않아도 초상권, 성명권 등 권리로도 손해배상이 가능한 점도 고려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터테인먼트업계와 학계는 왜 퍼블리시티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계속할까. 초상권 등 '인격권' 만으로는 유명인의 권리 보호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퍼블리시티권의 핵심은 유명인의 사진, 성명 등이 인격권은 물론 '재산권' 성격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손해배상은 크게 재산상 피해와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으로 나뉘는데 인격권만으로는 재산상 피해 배상은 사실상 어렵다.
퍼블리시티권에 정통한 최승재 변호사는 "엔터테인먼트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유명인의 명성과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유형이 광고뿐만 아니라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으로 다양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인격권 침해에 대한 배상만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침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퍼블리시티권이 인정되면 유명인의 초상권 등을 부동산이나 특허권과 마찬가지로 양도, 상속 등으로 거래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현실에선 이미 퍼블리시티권을 바탕으로 다양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연예인이 기획사에 본인의 퍼블리시티권 사용 권리를 맡기는 게 대표적인 사례. 이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정한 '대중문화예술인 표준계약서'에도 명시돼 있을 정도다. 스포츠스타 등과 퍼블리시티권 사용 계약을 맺고 캐릭터 사업을 벌이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조정욱 법무법인 강호 대표변호사는 "퍼블리시티권을 부정하면 이 같은 행위는 모두 잠재적으로 불법이 되는 것은 물론 퍼블리시티권을 바탕으로 한 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퍼블리시티권이 부정되는 현실은 '한류'로 대변되는 엔터테인먼트·문화 산업의 국제화와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연예기획사 6곳이 합작해 만든 UAM의 정영범 대표는 "최근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연예인의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에서 해당 권리가 부정되는 마당에 외국에서 유명인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뒤늦게나마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입법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길정우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월 퍼블리시티권을 법제화한 '인격표지권 보호 및 이용에 관한 법률안' 을 대표발의했다. 길 의원은 "퍼블리시티권 인정 자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므로 법안이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