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대해 원화 가치가 저평가돼 있다며 예외적인 경우에만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또 한번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기존의 환율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외환 당국의 개입 수위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 재무부는 30일(현지시간) 의회에 제출한 ‘주요국 경제ㆍ환율 정책’ 반기 보고서에서 “한국 정책 당국에 무질서한 시장 상황과 같은 예외적인 환경에서만 환율 개입을 제한하도록 지속적으로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재무부는 일본ㆍ브라질ㆍ인도ㆍ러시아 등 다른 대부분의 주요20개국(G20)과 마찬가지로 한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할 경우 곧바로 해당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보고서는 “시장 참가자들은 올해 초 한국 당국이 일본 엔화 약세에 대응해 원화 강세 속도를 줄이기 위해 시장에 강하게 개입했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달러 당 원화 가치가 올해 6월24일 저점에서 9월 말 7.6% 오르는 등 올 들어 완만한 속도로 절상되고 있다”면서도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인용해 실질실효환율이 여전히 2~8% 정도 저평가돼 있다고 주장했다. 재무부는 “한국 당국이 해외 자본 유입이나 환율절하 압력을 제한하기보다 금융 부문의 위험을 직접적으로 줄이는데 거시정책의 초점을 맞추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재무부는 한국 정부가 수출 의존도를 줄이도록 과감한 조치를 취하도록 강력 촉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이와 함께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올 9월 말 기준 3,260억달러에 이른다”며 “IMF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적정 수준이며 늘어나는 외채 규모 이상의 추가적인 외환을 확충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기획재정부는 미 재무부의 이 같은 요구와 관련해 현재의 정책방향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기재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는 것이고 우리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보고서로 크게 영향 받을 일 없고 크게 우려할 것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방침은 미 재무부의 판단과 상관없이 최근 급속한 원화 가치 상승이 수출경쟁력 약화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한국경제에 악영향이 없도록 ‘스무딩 오퍼레이팅(미세 개입)’ 전략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외환 당국은 지난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054원50전으로 연중 최저점을 찍자 2008년 7월 이후 5년 만에 공동으로 개입, 환율을 1,060원대로 끌어올린 바 있다.
앞서 미 재무부는 4월에도 “한국이 통화 절하로 교역에서 이점을 얻고 있다”며 외국은행 국내 지점의 선물환포지션 한도 규제 등의 조치를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또 미 정부는 의회 압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으면서도 “중국 위안화가 상당히 저평가돼 있다”고 비난했다. 위안화 가치가 오르고 있지만 필요한 만큼 빠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재무부는 “중국이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축적해왔는데도 올해 외환을 대규모로 사들이는 것은 시장의 위안화 절상 움직임을 방해하려는 행동으로 해석된다”며 “앞으로 정책 변화를 위한 추가적인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에 대해서는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당국의 정책을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미 재무부는 이례적으로 독일의 수출 주도형 경제 모델이 유럽 경제 회복을 저해하고 세계 경제에도 피해를 준다고 공개 비판해 그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보고서는 “독일의 빈사 상태인 내수 성장과 과도한 수출 의존도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경제의 리밸런싱(재균형화)를 방해하고 있다”며 “그 결과 유로존 경제가 수요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고 세계 경제도 디플레이션에 빠져 있다”고 비난했다.
보고서는 “독일의 상품, 서비스, 자본의 순수출이 2012년 중국의 순수출을 넘어섰다”며 독일은 세계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같은 비판은 최근 미국 정보기관의 앙겔라 메르켈 독일 도청 의혹으로 독일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역공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