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회의에서 회장단은 예상대로 최근 현안들이 기업가의 의욕을 떨어뜨려 실물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강력히 표명했다. 또 정부의 재벌개혁 방침에 대해 「산업경쟁력 강화」의 필요성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아니냐고 우려했다.손병두(孫炳斗)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이날 회의가 끝난후 『최근 일련의 사태가 기업가의 의욕저하를 초래해 실물경제를 위축시켜서는 안된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孫부회장은 「일련의 사태」가 무엇을 말하느냐는 질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지 않는가. 회장단은 최근의 개별 사안들이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고 말해 최근 상황을 보는 회장단의 불편한 심기를 전했다.
회장단회의후 열린 원로자문단와의 오찬간담회에서도 이같은 분위기는 이어졌다. 신현확(申鉉碻) 전 총리 등 원로들은 『정부가 재벌정책에 대해 너무 조급해하는 것같다.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정부당국자들이 외국언론의 지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잦다. 가려서 수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기업인이 존경받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마음놓고 장사할 수 있는 시대가 언제 올 것인가』라는 한탄과 『근본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파생적 문제에만 접근하면 파생적 문제가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물론 『기업에서도 과거 관행을 스스로 고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기업 스스로의 분발을 촉구하는 자성(自省)도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정부 재벌개혁 방침의 지향점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였다. 인터넷시장이 1년에 10배씩 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상무부는 「디지털 이코노미」라는 정책을 발표,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인데 한국 정부는 오늘의 문제를 어제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아니냐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孫부회장은 또 『기업인이 구속되는 일이 재발되지 않았으면 한다. 국가에 대한 공로가 있고 열심히 노력해온 분에 대해서는 정상이 참작되길 바란다』며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불구속수사를 재차 촉구했다.
전경련은 이에 앞서 회장단회의에 보고한 「최근 경제동향의 특성과 대응과제」란 자료를 통해 생산, 소비, 투자 등 실물지표가 연초부터 상승세를 보이고 있으나 최근들어 경제불안요인이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역흑자 축소, 금융시장 불안, 금리상승 등 고비용 경제구조 회귀가능성, 재정부담 증대 등을 경제불안요인으로 꼽았다.
전경련은 이같은 상황에서는 기업의 투자의욕과 경영활동을 제약할 수 있는 제도 및 정책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관련, 일률적으로 지배구조를 강제하지 말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업구조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서울은행 매각실패, 대한생명 처리지연, 현대증권 주가조작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리상승, 투신권의 환매, 기업도산 위험 증대 등의 금융시장 불안이 초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정부의 섣부른 정책과 일관성없는 때려잡기식 재벌개혁 추진이 경제불안을 불러오고 있는 것아니냐는 우려가 이날 회장단회의의 결론인 셈이다. 과거 재벌개혁이 추진될 때마다 재계가 경제불안을 무기로 이를 좌절시키곤 했던 경험때문에 회장단회의의 주장에 무게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IMF(국제통화기금)체제 극복이라는 미증유의 과제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란 점을 감안하면 재계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 힘든 실정이다. IMF사태를 불러온 원인(遠因)중 하나가 재벌체제였지만 최근 경제불안의 원인(原因)중 하나가 정부의 중심없는 정책추진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날 회장단회의에는 5대그룹 회장중 金전경련 회장과 손길승(孫吉丞)SK 회장만 참석해 어색한 모습였다. 정몽구(鄭夢九)현대 회장은 당초 회의 참석의사를 밝혔으나 이날 아침 『갑작스런 일이 생겨 참석할 수 없게 됐다』며 양해를 구했고 이건희(李健熙)삼성 회장과 구본무(具本茂)LG 회장은 일찌감치 불참의사를 전해왔다. 具 LG 회장은 올들어 전경련 회장단회의에 단 한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재계는 鄭현대 회장의 경우 현대 주가조작사건때문에 갑자기 불참했고, 李삼성 회장과 具LG 회장은 빅딜(대규모 사업교환)과정에서 생긴 전경련에 대한 감정때문에 불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손동영기자SON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