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영국 암호해독 비밀요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영국군에게 히틀러만큼이나 가장 큰 골치덩이는 독일군 암호기계 '에니그마(Enigma)'였다. 언뜻 봐서는 타자기처럼 생겼으나 내부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 해독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암호체계로 유명했다. 이에 대한 해독기술이 없었던 연합군은 패배를 거듭하기 일쑤였다. 군사 암호 전문가들로는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영국 정보당국은 지난 1939년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라 불리우는 시골마을에 암호해독 본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집트 상형문자 전문가, 십자말풀이 전문가, 체스 챔피언, 당대 최고의 수학자 등 '의외의' 인물들을 비밀리에 불러모았다. '복잡한 수학연산이 반영된 암호해독에는 수학적 이해력과 창의력이 필수'라고 생각한 정보국의 해법은 적중했다. 이듬해 3월 블레츨리 파크 요원들의 수학적 논리를 응용한 해독 시스템은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게다가 암호 해독과정에서 발생한 연구의 부산물들이 훗날 응용과학의 초석이 됐다. 특히 암호해독을 위해 개발된 기계는 '현대적 컴퓨터'의 모태가 됐고 암호해독 아이디어는 '인공지능'의 토대가 됐다. 기초과학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휴대전화, 컴퓨터, 자동차, 우주선을 만드는데만 기초과학을 사용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수학 공식으로 날씨를 예측하고 고수익 금융상품을 만들어낸다. 또 경기변동의 원인을 설명하고 정책효과를 분석해내는데 미적분뿐만 아니라 물리학까지 동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도 최근 기초과학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올해 기초연구사업 예산은 지난해에 비해 12.7% 증가한 9,451억원으로 책정됐다. 여기에 연구가 실패하더라도 창의적 연구라면 지원을 끊지 않겠다는 '성실실패 용인 제도'도 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뒤처져 있다. 3년간 이공계 대학에서 이탈한 학생이 무려 5만6,000명에 이르고 있고 신입생 정원을 못 채우는 기초과학 관련 학과가 흔하다. 기초과학은 직접적인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초과학이 지닌 창의력은 모든 과학적 결과물의 모태가 되며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독특한 발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때 'IT 강국'임을 자부하던 우리의 최근 성적표는 초라하다. 일부 주장처럼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투자 부족이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도 결국 수학적 논리의 산물임을 볼 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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