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수수료의 75%는 은행들이 타행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스스로 깎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은행 스스로 얼마만큼의 수수료를 받겠다고 결정할지는 경영적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임종룡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2일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융지주사 전략담당 임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은행 수수료는 은행이 결정할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당시 "수수료를 결정할 때 은행의 자율성이 제고됐으면 한다"고 건의한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렇게 임 위원장은 당국은 은행 수수료 항목의 4분의1가량에 대해서는 개입한 바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다 은행들이 타행과의 경쟁 때문에 수수료를 낮춘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임 위원장의 말대로 은행 수수료의 대부분은 은행이 결정할 수 있는 구조일까. 엄밀히 따지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1. 당국 개입 수수료 항목 25%뿐인가
기업고객까지 포함땐 맞지만
ATM·중도상환수수료 등은 당국 압박으로 수수료 낮춰
실제 금융당국이 직간접적으로 팔을 비튼 수수료 항목은 되레 25%가 채 되지 않는다. 임 위원장의 말이 맞는 부분이다. 단, 수수료 적용 대상이 '수출입 수수료'처럼 기업 고객인 것까지 모두 포함했을 때 이야기다.
은행들이 인상을 요구하는 부문은 개인 고객 대상의 수수료가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것이 자동화입출금기(ATM) 수수료다. 2011년 시중은행들이 ATM 수수료를 낮춘 배경에는 금융감독원의 강한 압박이 있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시중은행 관계자는 "당시 권혁세 금감원장이 ATM 수수료 50% 인하를 공언한 후 은행들로서는 수수료를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며 "당시에도 ATM 수수료가 상당히 낮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지만 당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내렸다"고 밝혔다.
중도상환수수료 또한 당국이 개입한 대표 수수료 중 하나다. 올 초 기업은행을 시작으로 연내 대부분의 은행이 인하할 예정이다. 이 역시 지난해 11월 금융연구원의 중도상환수수료 관련 세미나에서 발표된 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세미나는 은행연합회가 금융연구원에 의뢰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상 금융위가 주도한 것으로 세미나를 통해 은행의 여신정책 담당자들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이 밖에 올 초 각 은행들이 2%포인트 인하한 연체이자율 또한 당국이 개입한 사례로 꼽힌다.
2. 금융당국 손 놓으면 … 은행 자율결정 가능할까
"천차만별 수수료 감독 필요" 정치권 압박에 사실상 불가능
임 위원장이 공언한 대로 금융사들이 앞으로 경영적 판단에 따라 수수료를 올리고 차별화하더라도 문제는 없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금융당국이 손을 놓더라도 정치권은 손을 놓지 않고 정치권이 압박하면 당국은 다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당장 중도상환수수료와 관련해서도 이군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3월 "인하가 시급하다"고 밝혔으며 ATM 수수료와 관련해서는 신학용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금융당국이 은행별 천차만별인 수수료가 합리적으로 조정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정치권의 압박은 계속되고 있다.
3 인상 외치는 은행, 서비스는 혁신했나
10년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어
급행창구·보완 완벽 ATM 등 새로운 수수료 모델 창출해야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은 은행들도 수수료 인상을 외칠 만큼 서비스를 혁신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역시 '아니다'에 가깝다. 대한민국 어느 은행을 가도 서비스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터넷 뱅킹이 활성화된 부분을 제외하면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다는 것이 고객들의 솔직한 속내다.
은행 관계자들은 "외국에서는 계좌 보관료를 따로 받을 정도로 수수료 체계가 잘돼 있다"고 하소연하지만 이는 국내 금융 시장에서 논의하기에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금융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은행이 기존의 수수료를 올리기 힘든 만큼 새로운 수수료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당국의 한 고위관계자는 "예를 들어 은행 창구 가운데 하나는 급행 창구로 만들어 조금 더 수수료를 받으면서도 빠르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든지, 보안 문제나 피싱 문제까지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ATM을 만들어 수수료를 더 받는다든지 하는 등의 새로운 서비스 자체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전직 은행장은 "다른 일반 기업들이 서비스를 혁신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은행은 너무 관행적으로 접근해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진정한 커머셜 은행이 되고 싶다면 은행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