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배경과 파장

남북·일본이 얽힌 삼각관계의 '흉사'..한일, 정략이용 흔적<br>"韓, 김대중사건 궁지 돌파구로…日, 실체규명보다 타협선택"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저격사건은 당시 동족이면서 적대관계인 남과 북, 거기에 숙적인 일본이 엮인 삼각관계의 `흉사'라는 점에서 진상규명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일양국 모두 사건후 1백일 이상을 수사했지만 결론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한국 측은 북한의 조종에 의한 범죄라고 본 반면 일본 측은 `남한내 혁명을 위한' 망상에 사로잡혔던 문세광의 단독범행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더욱이 저격범 문세광이 사건 직후 체포돼 128일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더는 말할 수 없기에' 실체적 진실규명은 이미 물건너 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그럼에도 국내의 여러 사가(史家)들은 이 사건이 육영수 여사 절명이라는 현실이외에, 특히 한일 양국이 서로 정략적으로 이용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1973년 8월 당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납치사건으로위기에 처했던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문세광 사건을 계기로 돌파하려 했으며, 일본측도 분명한 실체 규명보다는 정략적인 타협을 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골자는 이렇다. 1972년 10월 유신정권 출범 즈음에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김 전대통령이 일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동포들과 함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자 그에 당황한 박 대통령과 중앙정보부가 한민통 결성식일주일 전인 1973년 8월8일 납치를 강행한 것. 사건 직후 일본 측은 납치사건의 범인을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1등 서기관 등일당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박 정권이 그 배후라고 지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박 정권은 납치 자체가 실패한 것도 큰 충격이었지만 범행 일체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국제적으로 도덕적 위기에 몰리게 됐다는 점에서, 특히 일본에게는 `낯을 들 수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다. 이게 바로 한일 양측의 `거래'가 시작되는 배경이다. 그런 상황에서 1974년 8월15일 저격범 문세광에 의한 박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직후 저격범이 문세광이라는 재일 한국인으로 요시이 유키오라는 이름의일본여권 소지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노신영(盧信永) 외무부 차관은 우시로쿠(後宮)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일본측이 일본인도 아닌 문세광에게 일본 여권을 발급해준 것은 분명히 일본측에 하자가 있다"며 발급 경위를 추궁한다. 한국 측의 `강공'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일본 측은 `재일 한국인의 범죄로서 일본 정부는 법률적 도의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한국 측은 들끓는 반일감정을 내세우며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까지 나서 일본을 몰아부쳤다. 이에 일본 정부가 "도의적 책임까지 없다고 한 것은 지나쳤다"며 엄중한 수사를할 것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한국 측은 김 총리가 당시 다나카(田中) 일본 수상에게 친서를 보내 "한일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가 하면 김동조(金東祚)외무부 장관과 국회까지 나서 한일 관계를 우려했다. 이례적으로 박 대통령까지 나선다. 그 해 8월30일 박 대통령이 우시로쿠 대사를 불러 사실상 `단교 위협'에 가까운대일 강경조치를 전했다. 그 내용에는 이른바 문세광 사건을 대하는 일본측의 태도로 우방국 여하를 판단하겠으며 일본 측이 성실한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한일간기본조약도 재고할 수 있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일국의 대통령이 일개 대사를 부른 것은 극히 드문 일로 통상적인 외교경로의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측은 양국관계를 우려, 한국 측 요구대로 자국내에서 문세광 사건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수사결과, 그 내용이 한국 측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세광에 대한 사형 집행을 이유로 수사를 영구미제로 남겨둔 채 서둘러 종결한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 주일 한국대사관의 김동운 1등서기관에 대한 수사도 벌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외에 박 대통령 저격사건은 국내 정치적인 역학구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다. 저격사건으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고 신직수씨가 후임으로 임명됐으나 단명했고 그 후 김재규씨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며, 대통령 경호실도 일명 `피스톨 박'으로 통하던 박종규씨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차지철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특히 차지철 경호실장은 별도의 정보라인을 운영하면서 중앙정보부의 보고를 가로채는 `월권'을 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중앙정보부장의 위상은 쪼그라들고경호실장은 팽창하는 권력중심 이동이 생기게 됐다는 게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러한 왜곡된 권력구조가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의 토양이 됐다는 시각도 있다. (??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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