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5월7일 14시20분, 독일 잠수함 U-20호가 영국의 4만4,060톤급 초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향해 어뢰 한 발을 쏘았다. 피격 18분 뒤 루시타니아호는 90m 깊이의 아일랜드 연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승객과 선원 1,957명 중 1,198명이 사망한 루시타니아호에 대한 무경고 격침은 세계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교전국인 영국과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의 군수물자 수송 여부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였다.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128명이 희생된 미국. 제닝스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독일에 대한 무례한 외교와 강압’을 이유로 사임할 만큼 강력했던 미국의 항의와 독일의 신속한 유감표명, 배상 약속으로 루시타니아호 사건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때부터 1차 대전 참전론이 힘을 받았다.
미국의 참전으로 이어진 루시타이아호 침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않다. 독일 잠수함 U-20호가 5월5일과 6일 이틀 동안 인근 해역에서 영국 선박 3척을 격침시켜 경계령이 발령된 상황에서 루시타니아호가 속도를 떨어뜨렸으며 호위를 위해 합류할 예정이었던 영국 구축함 2척도 따라붙지 않았다.
가장 큰 의혹은 2차 폭발. 독일이 쏜 어뢰는 분명 한 발인데 침몰 전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다. 비밀리에 적재한 화물에 불이 붙은 탓이다. 화물칸에 실린 탄약 4,200상자와 1,250상자의 포탄은 거대한 선체를 순식간에 삼킨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루시타니아호는 군용 수송선’이라는 독일의 주장이 맞았던 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속속 나와도 루시타니아호 침몰은 ‘비무장 여객선을 경고도 없이 공격한 야만적 행위’라는 기억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승자는 거의 모든 것을 독식한다. 역사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