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사의 전환점`.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처음 발생한 기업의 유형자산 감소에 대해 조세연구원 현진권 연구위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유형자산이란 한 마디로 실물자산. 토지와 건물, 기계장치, 비품, 공구 등을 말한다. 상대적인 개념인 무형자산, 즉 지적재산권이나 상표권 특허권을 지닌 우리 기업들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상 기업가치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유형자산의 감소를 기업이 지닌 부(富)의 총량감소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상 초유인 유형자산의 감소를 단순하게 설비투자 감소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업의욕상실과 해외이전, 설비노후화 등이 맞물려 있다. 당장 대책마련도 쉽지 않다. 당분간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기업가치 급락=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는 외환위기 당시의 통계와 비교하면 바로 나온다. IMF구제금융을 받던 97년과 98년 당시 설비투자 증가율이 -6.4%와 -37.7%까지 떨어졌지만 국내기업들의 유형자산 증가율은 97년 12.5%, 98년 14.2%의 두자릿수였다.
설비투자가 최악인 상황에서도 늘어나던 유형자산이 감소한 원인은 크게
▲기업들이 설비노후화를 상쇄할 만큼 투자를 하지 않았고
▲부채비율 하향조정 등을 위해 적극적인 자산매각에 나선 데다
▲대형 사업장의 폐쇄와 생산기지의 해외이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자산증가율이 마이너스라는 사실은 주식시장에도 악재다. 주가란 기본적으로 기업의 내재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기업의 자산증가율이 마이너스라는 사실은 현재 주가조차 불안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잠재성장하락 불가피=내용도 좋지 않다. 전체적으로 유형자산이 감소했어도 유망산업 또는 경쟁력있는 산업의 자산이 늘어났다면 산업구조고도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통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산이 늘어난 곳은 가죽ㆍ가방 및 신발(8.0% 증가), 고무 및 플라스틱(7.3), 기타 운송장비(5.7%) 등 비주력산업에 국한돼 있다. 주력인 전자와 자동차, 화학 등의 감소율은 평균치를 밑돈다. 산업구조조정의 효과는 발생하지 않은 채 기업가치만 떨어지는 형국이다.
흔들리는 기업현실은 경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 위원은 “성장의 밑거름인 노동과 자본중 자본의 주요 구성요소인 기업가치의 총량이 감소한다면 잠재성장률 저하로 직결될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경제의 다른 주체인 정부부문과 가계부문이 긴축재정과 가계부채로 곤궁에 처한 상태에서 기업부문마저 자산이 감소한다는 점은 우리 경제가 침체와 저성장의 악순환에 접어들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을 경고하는 대목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연구기관들은 이미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4%대로 낮춰 잡고 있다.
◇대안은 없나=마땅치 않다는게 문제다. 기업의 가치란 단시일에 높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설비투자가 급증해도 자금흐름은 크게 늘어나지만 총량 자체는 더디게 증가해 기업가치가 크게 늘어나기 어렵다. 단기처방이 어렵다는 얘기다.
기업가치를 늘리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로 압축된다.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설비투자를 꾸준히 늘리며
▲기업의 생산활동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하나 쉬운 게 없고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연구위원은 “금리가 낮고 수출이 잘되는 상황에서 기업의 자산이 감소한다는 점의 이례적”이라며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우리 경제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성장동력 상실이라는 국면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승량기자 sch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