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소설 '덕혜옹주' 인기몰이

마지막 조선황녀로 태어나 비운의 삶… 작가 권비영 "이 책은 그를 위한 진혼곡"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를 그린 최초의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덕혜옹주는 출생부터 성장까지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가며 망해버린 나라의 마지막 황녀로서 한 많은 비운의 삶을 살았다. 소설가 권비영씨는 최근 비운한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다산책방 발행)를 소설로 통해 선명하게 되살리고 있다. 권씨는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며 "조국과 운명을 함께했지만 종국엔 철저히 버려졌던 여자. 온몸이 아플 정도로 그리움을 품고 살았던 여자. 이것은 그녀를 위한 진혼곡"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밝혔다. 권씨가 이 책을 펴내기 전까지 국내에서는 역사서로도 소설로도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적이 없다. 덕혜옹주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세밀하고 감성적인 필체로 비로소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 셈이다. 권씨는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까지 송두리째 흔드는 법"이라며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황녀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지 못했던 덕혜옹주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삶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잊혀져버렸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집필 이유를 들었다. 그는 "덕혜옹주에 대한 책은 단 한 권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일본 번역서"라며 "우리가 한 번도 조명하지 않았던 그녀를 일본에서 다뤘다는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줄기는 물론 덕혜옹주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덕혜옹주는 단지 운명에 체념하는 우울한 여인이 아니다.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칼날이 번뜩일 때는 고개를 숙이며, 그 안에서도 분기탱천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지치지 않고 탈출을 꿈꿨고, 좌절의 순간에 매번 기적을 바랐으며, 그러면서도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던 여인이다. 가장 이상적인 신분을 지니고서도 가장 현실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 우리들의 여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차를 마시거나 마시지 않거나'에 국한돼 있었던 그녀의 삶. 단 한 번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더욱더 옥죄었던 것은 바로 그 고귀한 신분이었다.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성 때문에 그녀는 개인이지만, 한순간도 개인으로 살 수 없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도, 황녀로서의 정체성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소설 속 어느 누구도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종, 영친왕, 의친왕 같은 황족뿐만 아니라 그들 아래에 있던 민초들도 스러져가는 나라의 상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개인의 안위를 도모하다가도 나라의 현실 앞에서 주춤거리고 흔들린다. 황폐한 땅에서, 잿빛 현실 속에서 짓밟혀도 또다시 일어서는 그들의 모습은 잡초처럼 피어나는 삶에 대한 희망과 욕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나라의 역사란, 개인들의 삶이란, 그렇게 비극과 희망의 틈바구니에서 흐르는 것임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60세 때인 1912년 후궁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옹주는 궁녀에게서 태어났지만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열네 살 때인 1925년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학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일본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고, 열일곱 살 땐 생모 양귀인이 숨져 이에 대한 충격으로 증세가 더욱 악화돼 정신질환인 조발성치매증 진단을 받았다. 이듬해 병세가 호전되자 일본은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오 다케유키와 덕혜용주를 정략결혼시켰고, 덕혜옹주는 딸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1년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또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투신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1962년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옹주는 5년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창경궁 낙선재에서 살았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77세의 일기로 한 맺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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