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12월 14일] 양털깎기

"개발도상국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치료법이 문제를 더 키운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이 맞다. 나는 세계은행(IBRD) 수석 부총재로 있는 동안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러시아의 금융위기를 다 경험했는데 IMF와 미국 재무부가 이 위기에 대처하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옵션 쇼크 등 핫머니 교란 심각 지난 2000년 IBRD와 IMF 연례회의를 1주일 남겨놓고 조지프 스티글리츠 IBRD 수석 부총재는 두 국제 금융기구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일로 스티글리츠는 제임스 울펀슨 총재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 27세에 예일대 교수가 된 뒤 프린스턴대와 스탠퍼드대 교수를 지냈고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정도로 학식과 경험이 풍부했던 스티글리츠가 왜 느닷없이 IBRD에서 퇴출된 것일까. 이는 스티글리츠가 국제 금융권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 등에 대한 IMF의 해법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통해 그는 세계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제 금융재벌의 의도를 간파했다. 사실 스티글리츠를 내쫓은 것은 울펀슨이 아니라 로런스 서머스 미국 재무장관이었다. IBRD 지분 17%를 가진 미국은 IBRD 총재 임명권과 안건 부결권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IBRD 운영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미국 재무부 장관이 IBRD 부총재 하나쯤 쫓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봐야 하는 것은 미국 재무부 뒤에는 국제 금융재벌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막후에서 미국을 움직여 온갖 돈벌이 기회를 만들어 낸다. 스티글리츠가 해고되기 직전에 입수한 IMF와 IBRD의 기밀문건을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이 문건에 따르면 IMF는 긴급구조를 신청하는 국가에 111개항에 이르는 기밀조항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전력과 수도∙철도∙은행 등 핵심 자산 매각과 자본시장 자유화 등 이른바 'IMF처방'이 포함돼 있다. IMF가 해당국의 환율과 금리를 살인적으로 높여놓으면 그 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된다. 여기에 자본시장 자유화를 통해 외국 자금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면 국제 투기자금은 싸질대로 싸진 해당국의 자산을 곶감 빼먹듯하게 된다. 이른바 '양털깎기'다. 1997년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상황을 떠올려보면 스티글리츠의 지적은 별로 틀린 것이 없다. 우리나라는 IMF의 요구대로 높은 환율과 금리 정책을 취해야 했고 이 때문에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붕괴되다시피 했다. 투기세력들은 국내 우량주식과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인 뒤 엄청난 차익을 챙겨 나갔다. 이때 자본시장의 빗장을 열어젖힌 후유증은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1월11일의 옵션만기 충격이다. 당시 투기세력들은 장 막판 1조8,000억원의 매물 폭탄을 쏟아내면서 지수를 53포인트나 끌어내렸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막대한 풋옵션을 미리 사놓고 시장을 흔든 것으로 보고 있다. 개방 부작용 막을 방안 마련돼야 외국 투기세력의 금융시장 교란은 이 뿐만이 아니다. 2006년 프랑스계 투자은행인 BNP파리바는 주가연계증권(ELS) 만기 직전 주가 조작을 통해 조기상환을 무산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같은해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주가 조작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문제는 이처럼 외국의 핫머니 때문에 금융시장이 출렁거리는데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옵션 쇼크만 해도 정부가 문제의 재발을 막겠다고 큰소리만 쳤지만 정작 한 달 만에 내놓은 대책은 기관투자가에 대한 사전 증거금 부과나 호가접수 시간 연장과 같은 알맹이 없는 내용뿐이었다. 특히 문제를 일으킨 외국 투기세력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속 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정부가 해외의 자금을 끌어들여 시장 파이를 키우는 것은 이해하지만 지나친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방안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우리 자산시장이 국제 금융재벌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살찐 양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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