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안협력 강조 마잉주후보 대만총통 당선<br>98·2002년 타이베이시장 연임…당시 이명박 서울시장과 인연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일어선 한국에 배울 점이 많습니다. 한국이 지난 10년간 이룩한 경제성과 경험을 참고해 대만을 이끌겠습니다.”
22일 실시된 선거에서 차기 총통으로 당선된 마잉주(
58ㆍ馬英九) 국민당 후보는 타이베이시장 시절에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대통령과 만난 인연이 있고 선거 과정에서도 한국의 경제발전과 ‘경제 살리기’ 정책을 언급하며 유권자의 지지를 넓혀갔다. 그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드라마가 대만에서 매우 환영받고 있으며 한국 연예인들에 대한 대만 팬들의 열기도 뜨겁다”며 한국과 대만 간의 교류 확대를 희망했다.
마 당선인은 일당 독재 시절 국민당이 길러낸 마지막 정치 엘리트이다. 지난 1950년 홍콩에서 학도군 출신의 공직자였던 부친과 중앙은행 외환국장이었던 모친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만 최고 명문인 젠궈(建國)고교와 대만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국민당의 중산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 하버드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땄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오자마자 총통부 제1국 부국장직을 맡아 탁월한 영어 구사력으로 장징궈(
蔣經國) 당시 총통의 영어 통역과 비서로 활동하며 정식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1984년 일약 국민당 부비서장으로 발탁된 그는 대륙위원회와 국가통일위원회 주요 간부를 거쳐 1993년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정부에서 43세의 나이로 법무부장에 올랐다. 개혁성향의 법무부장으로 행정원에 입성한 그는 금권과 폭력으로 얼룩진 대만 정계를 대대적으로 사정하기 위해 폭력 조직과의 전쟁을 치르다 국민당 내 본토세력과 헤이진(黑金ㆍ검은돈) 비호 의원들의 협공으로 중도 하차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잉주=클린’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청렴결백하고 소신과 강단이 있는 정치 지도자로 주목을 받던 그는 국립정치대학 법학교수로 돌아갔다. 당시 181㎝의 훤칠한 키에 꽃미남 외모의 마 교수에게 끌려 수백명의 여학생들이 수업에 참가, 화제가 됐다.
1998년 정계로 돌아온 그는 타이베이시장 선거에 출마해 연임을 노리던 당시 천수이볜(陳水扁) 시장을 5% 차로 누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온화한 언행으로 ‘샤오마거(小馬哥)’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압도적 인기도를 바탕으로 2002년에는 64.1%의 표를 얻으며 시장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이 시절 서울시와 자매 결연을 맺은 타이베이시의 시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해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 버스 전용차선 도입 등을 벤치마킹, 타이베이시에 적용하기도 했다.
이후 2005년 7월 롄잔(連戰) 명예주석에 이어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됐고 곧바로 치러진 지방선거의 대승을 이끌었다.
마 당선인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그가 박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해 약소국 대만을 이끌 총통감으로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도를 바탕으로 향후 대만의 정국 주도권을 쥐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고 있다.
◇마잉주의 약력
▦1950년 홍콩 출생(58세)
▦1972년 대만대 법학과 졸업
▦1981년 하버드대 법학박사
▦1981년 장징궈 총통 영어비서로 정계 입문
▦1993년 법무부장
▦1996년 정무위원
▦1997년 대만대 조교수
▦1998년 타이베이시장(2선)
▦2005년 국민당 주석
▦2008년 대만 총통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