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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정치다.'
미술이 언제부터 개인의 감정표현에 충실했던가, 따져볼 일이다. 고대의 예술은 용도와 목적이 분명한 일종의 기술(techne)이었다. 중세시대의 예술은 종교와 정치에 의한 수단적 성격이 강했으며, 근대로 넘어가면서는 신흥 지배층으로 떠오른 자본가들이 예술가를 쥐고 흔들었다. 즉, 미술이 작가 개인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감정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그림이 정치가 된다'는 사실을 진즉 꿰뚫었던 군왕이 있다. 정조다. 규장각을 설치해 신진 정치세력을 양성할 기반을 다진 정조는 도화서 화원 중 유능한 자를 별도로 뽑아 '자비대령' 화원이라 부르면서 규장각 직속으로 배치했다. 이 자비대령 화원들이 그린 역작이 바로 1796년작 '화성능행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다. 1795년 2월 9일부터 16일까지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를 수원으로 모시고 가 그곳에서 환갑연을 베푼 행사를 기록한 8폭 병풍 그림이다. 정조는 비운의 사도세자의 격을 높이는 동시에 자신의 정권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정치적 목적 아래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화성에서 기획했다. 그 정치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널리 선전한 것이 바로 이 병풍이었다
기나긴 왕실 행렬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이 그림에는 개미떼 만큼이나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자그마치 7,349명이다. 루브르박물관의 명물인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비할 바 없다. 화성의 공자묘 참배장면부터 군사훈련, 환갑 연회, 정조가 함께한 활쏘기와 불꽃놀이,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행렬도까지 행사인원과 구경꾼들을 포함한 수다. 김득신·이인문 등 그림을 그린 7명의 화원도 놀랍지만, 이를 헤아린 연구자도 대단하다.
일간지 미술전문 기자 출신의 미술 저널리스트로 서울옥션 대표이사·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로 있는 저자가 농축된 안목과 해박한 지식을 한껏 펼쳐 놓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미술의 역작으로 꼽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부터 장승업의 '기명절지도' 등 101명 작가의 명품 한국화 119점이 한 권에 담겼다. 필력 좋은 저자의 설명이 쉽게 읽히고, 화질 좋은 도판이 시원하게 담겨 미술애호가도 애장할 책이다. 시대 순으로 엮어 조선 전기와 중기는 안견 화파와 중국 영향의 절파 화풍을, 후기는 중국 남종화의 전래와 진경산수화, 겸재화파에 이어 김홍도와 그의 추종자, 서민의 민화, 추사와 문인화파 등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4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