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 경제는 암울한 한 해를 보냈다. 당초 성장률이 5%를 웃돌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지만 극심한 내수침체로 3%내외에 불과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수출만이 독야청청했을 뿐 기업투자 및 소비가 크게 위축된 탓에 성장률이 지난 98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특히 투자와 소비위축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우리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가로막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은 2004년 새해를 맞아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과 김병주 서강대교수(경제학)를 초청해 `새해 경제전망과 과제`를 짚어보는 신년대담을 가졌다. 임종건 서울경제신문 논설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대담에서 김 교수는 “경기순환상으로는 올해 성장률이 5%에 이를 수 있지만 투자부진, 가계부채 등의 문제로 중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은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정부가 일관성 있는 정책을 통해 투자활성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공 이사장은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확실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확립해 국내외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임종건 논설실장=지난해에는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기대감도 높았지만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소비위축, 투자부진 등의 영향으로 성장률이 2%대에 머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올해 우리 경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공일 이사장=대다수 연구소들이 올해 경제성장률이 5%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한국경제 침체원인을 살펴보면 이라크 전쟁 등의 대외 여건보다는 내수부진의 영향이 훨씬 더 컸습니다. 올해도 가계부채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오히려 장기화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더욱이 기업들은 여전히 설비투자를 꺼리고 있습니다.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이고 유동성도 아주 풍부한데도 기업 투자가 부진한 것은 경제외적 요인 때문입니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이 없는 탓에 기업들이 느끼는 불확실성도 높아져 투자가 위축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미국경기가 생각보다 빨리 호전되고 있기 때문에 수출여건은 좋아질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신용불량자 문제 등이 쉽게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에 체감경기는 쉽게 호전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지금은 투자를 살리는 것이 관건이고, 투자를 살리려면 정치 등 경제외적 요인을 해결하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김병주 교수=9ㆍ11 테러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침체국면으로 돌아서자 우리 정부는 소비증가를 통한 내수진작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소비진작이 과도했고 정책도 일관성을 상실한 탓에 결국 카드문제가 벌어졌고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됐습니다.
올해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경제여건도 좋고 중국경제도 아직은 괜찮기 때문에 수출여건은 지난해 보다도 나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출이 잘되면 수출과 연관된 산업들이 동시에 호황을 누려 경기를 이끌어야 하지만 최근에는 수출 연관산업이 앞 다투어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에 수출이 늘어도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경상 및 재정수지 적자로 달러화가 약세를 지속하면서 원화가 강세를 보일 경우 수출이 다시 주춤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계수상으로 5%대 성장을 달성할 수 있어도 중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사공 이사장=중장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대외 여건은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특히 중국의 경제발전은 우리에게는 도전이자 기회입니다. 중국은 현재 매년 7~8%씩 성장 하고 있는데 복리로 계산하면 10년마다 경제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중국 상해나 베이징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거리입니다. 반면 중국내에서도 상해나 베이징으로 3시간만에 갈 수 없는 곳도 많습니다. 이렇게 유리한 지정학적 여건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력 및 연구개발(R&D) 인프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성장을 새로운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동북아 허브를 비롯한 각종 경제발전 구상도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올해 우리 경제가 안정적인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김 교수==가장 시급한 것은 가계부채와 신용카드 문제 해결 방안입니다. 이와 함께 설비투자를 확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또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는 문제도 시급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공 이사장=이제는 말보다 행동을 보여줘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 지는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더 이상 말만 앞세우면 국가 신용등급만 더 떨어질 뿐입니다. 동북아 금융허브 등 정부가 목표를 제시했다면 이를 차질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액션을 보여줘야 합니다.
▲임 실장=불법대선자금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데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가 계속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변수로 경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은데요.
▲김 교수=순수하게 경기만을 놓고 보면 5%대 성장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문제는 총선 때까지 정치가 어지러울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기업들이 본격적인 설비투자에 나서는 시기도 그만큼 늦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에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총선을 치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총선이후 정치권의 새로운 변화와 있어야 되고, 또 그렇게 기대를 해 봅니다.
따라서 검찰이 철저하게 불법대선자금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에서는 정치자금 관련 수사가 지나친 엄벌주의로 경제에도 큰 주름살을 지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철저하게 수사를 해야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면 중장기적으로 기업 투명성이 높아지고 소액주주의 이익을 희생하는 풍토도 사라져 기업경쟁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공 이사장=경제가 잘 되려면 정치권의 개혁이 필수적입니다. 기업 비자금 문제는 정치 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돈 안 쓰면 안 되는` 선거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지역구 관리하는데 한 달에 적어도 1,000만원이나 들어간다고 하는데 의원세비는 고작 600만원 수준입니다. 결국 나머지 400만원은 기업에서 가져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정치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기업이 만들어 내는 상품의 원가는 높아지고 결국 해외에서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임 실장=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화물연대파업, 새만금사업 등 여러 분야에서 시행착오가 빚어져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많은데요….
▲사공 이사장=우리는 강력한 대통령책임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정치체제에 비해 대통령의 리더십이 더욱 중요합니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좋은 사람을 쓰고, 조직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특히 경제정책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조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정책의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경제부총리가 있지만 힘이 실리지 않아 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불안감을 주고 있습니다. 부처 또는 사람마다 하는 말이 틀리니 불안감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획조정부`같은 부처를 만들어 조정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 교수=정부가 올 한해동안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끌려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소수의 이익단체에 휘둘리는 모습도 보였고, 경제정책도 중심을 잃었다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5년에 불과한 상황에서 모든 선거공약을 다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급한 과제를 선정해 이를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임 실장=그렇다면 우리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공 이사장=경제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국민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일자리는 기업들이 늘어나야 창출될 수 있습니다. 전세계 모든 나라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외국기업을 유치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도로, 교량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기본 요건입니다. 이런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프트웨어입니다. 소프트웨어는 바로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노사문제에 있어서도 불법파업은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외국인들은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센티브를 제공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그 법을 바꾸더라도 법을 지키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어야 합니다.
<정리=김홍길기자,사진=이호재기자 what@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