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삼보종찰을 가다]<2>수행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탑인 금강계단이 가린 건물이 적멸보궁

[삼보종찰을 가다]수행 장선화 기자 india@sed.co.kr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탑인 금강계단이 가린 건물이 적멸보궁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이 있다. ‘돈(頓)’은 어느 날 문득 ‘오(悟)’는 깨닫는다는 뜻이고, ‘돈수(頓修)’는 깨달음이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이므로 어느 날 문득 깨닫든, 수준별로 단계를 밟아 깨닫게 되든 깨달으면 수행은 거기에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돈오점수란 ‘깨달음(頓悟) 뒤에도 수행은 계속되어야 한다(漸修)’쯤으로 설명되고 있다. ‘점(漸)’은 ‘차차’ ‘수(修)’는 ‘닦아 나간다’는 뜻이니, ‘점수(漸修)’란 원래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따라 차근차근 수행자의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다 보면 부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경전 위주의 공부를 하는 교종 계열의 입장이다. 선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돈오(頓悟)’까지 1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일주일 만에 깨달음의 소식을 듣든 어느 순간 깨달음(悟)을 얻었다면 그 순간 이미 부처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질적으로 다른 깨달음의 길인 돈오와 점수가 어떻게 서로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이 잘못된 만남이라고 한 스님은 말씀하게 된 것일까? 부처님이 열반 하신 지 어언 2,500년 이상이 지났고, 수많은 제자와 고승대덕들에 의해 엄청난 분량의 경전과 해설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처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경전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져서 부처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경전만으로도 지쳐, 부처는 정작 찾아보지도 못할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현란한 문장 구사에 중생은 주눅이 들어 스님 행동이 부처 말씀과 다르지 않은가 의문을 가져도 다이아몬드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경전의 한 구절을 꺼내어 부처도 이렇게 하셨다고 법문을 설하시면 그냥 그런 줄 머리 조아리며 합장할 밖에. 중생들의 원성이 높아가던 시절 지눌 스님이‘중생 속으로’를 외치며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내걸고 정혜결사를 조직했다. ‘돈오점수’는 ‘돈오’하고 ‘점수’하라는 말 같지만, 실은 ‘점수’하는데 있어 부처님 마음을 놓치고 경전의 글자에 빠져 허우적대면 손가락만 보고 부처는 보지 못하는 한심한 꼴이 되니, 부처님 마음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경전을 대하라는 꾸짖음이다. ‘정혜쌍수(定慧雙修)’도 참선과 경전공부를 서로 견주면서 함께 닦으라는 말 같지만 역시 ‘정(定)’을 ‘혜(慧)’보다 앞에 둠으로써 부처님 마음공부가 말씀공부의 길잡이가 됨을 자존심 상하지 않게 충고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돈오돈수를 들고 나오셨다. 돈오했으면 돈수지 더 이상 점수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말씀.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 운동을 시작한 지도 어언 800여년 이상이 지났다. ‘돈오점수’가 ‘돈오’한 후에 ‘점수’가 계속 이어진다는 말로 해석돼 ‘돈오’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어떤 스님에게는 수행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로 사랑 받았다. 깨우치지 못했으면서 깨우친 척하고, 깨우친 스님과 깨우치지 못한 스님이 명확히 구분 안 되는 두리뭉실한 상황이 올까 염려된다. 성철스님이 몸으로 보여준 수행과정과 돈오돈수. 수행을 하려면 제대로 하고, 부처님 마음을 보도록 끝장을 내라는 말이다. 점수할 것이 없는 세계까지. 흔들림이 없는 세계에 오르라는, 수행자의 게으름을 경계하는 선승의 엄중한 꾸짖음이라고 여겨진다. 선(禪)이란 이처럼 부처 마음을 올바로 깨치려는 수행방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전을 통하지 않고도 부처를 만날 수 있어 학식과 지능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해 왕실과 귀족의 호응을 받았던 교종의 한계를 극복하여 가방 끈이 길든 짧든 모든 중생을 부처의 세계로 함께 태우고 가려는 대승(大乘) 정신의 나타남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할 때 제자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던지는 ‘게(偈)’나 수행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주고 받는 ‘선문답(禪問答)’이 별 목적의식 없이 대중에게 말해지고, 은유와 비유가 가득한 ‘게송(偈頌)’이 아무 때나 던져진다면 부처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현학의 허세를 과시한 경전 전성시대나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멋들어진 시의 해석을 스님이 독점하고 있다면. 불교에서 참선, 경전 공부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계율(戒律)’이다. 계율이란 석가모니의 제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을 이름이다. 스님들이 일정한 곳에 모여 3개월 동안 수행에 전념하는 안거(安居) 기간이 끝나는 날은 정신력과 체력이 소진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런 스님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긴 어떤 신도들은 체력을 빨리 회복하라고 고기는 차마 드리지 못하고 북어를 삶아 우려낸 진한 국물을 공양해 원기를 회복시킨다고 한다. ‘사판승(事判僧)’은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접촉이 많고, 근래에는 해외 포교 활동이나 자선 활동에 참여하는 빈도도 늘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 연방 지역에서 도움 활동을 벌일 때에는 날씨도 춥고 현지인들과의 원활한 협조를 위해 독한 술을 함께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안거 마지막 날 안거 중에 죄를 저지른 일이 없었는가를 서로 묻고 답하는 참회 의식을 치르는 승가의 전통이 있다는데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 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때에 걸식을 해 공양했는데 여러 집을 다니다 보면 고기를 다루는 집의 시주가 섞여 있는 경우도 있으나 부처가 공양주의 정성은 다 같으니 공양을 받으라고 한 예도 있고, 다른 나라 불교 스님의 경우에는 고기를 먹는 것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다. 부처의 말씀이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것 같고, 외국 불교 계율과의 비교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계율을 지켜나가는데 있어 불가에서 소중히 여기는 우화가 있다. 거친 파도 위에 공기를 채운 가죽주머니가 스님들을 태우고 아슬아슬 떠있는데 스님들은 물에 뜨는 가죽주머니 전부를 주어도, 반을 떼어 주어도, 아주 조금을 떼어 내어도 물에 빠져 죽기는 매 한가지라는 것. 계율이란 이 물에 뜨는 가죽주머니와 같아서 조금 어기든 많이 어기든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이 부낭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절의 간부 스님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으니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며느리한테도 가르쳐 주지 않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법계(法界)를 설하셨을까. 세월이 흘러 수행승들의 불도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 있고, 사찰의 유지와 운영사무를 맡고 있는 사판승들이 그 일의 특성상 사회교류를 원활히 할 필요성도 높아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계율은 누구나 똑같이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적용대상 또는 계나 율의 변경 필요성이 제기된 때에는 공식적으로 논의하여 결정사항이 종단 내에 공개적으로 전파됨이 바람직할 것이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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