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현대자동차는 3∙4분기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눈길을 끄는 데이터 하나를 제시했다. 보유 부채와 자산, 파생상품에 대한 환율 민감도를 표시한 이 데이터에는 환율이 5% 오르거나 내릴 때 법인세 부과 전 당기순이익에 미치는 영향이 지난해 말 1,214억원에서 올 9말에는 990억원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포함돼 있었다. 환율 변동에 따른 현대차의 재무구조 불확실성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원∙달러와 원∙엔 환율이 최근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수출 기업의 수익성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거의 경험을 볼 때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 국내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익성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와 약간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환율 하락이 수출 기업에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기업들의 환율 변동에 대한 대비 능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됐기 때문에 그 영향은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예상은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평가한 환율 변동에 따른 민감도 분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현대모비스의 경우 환율이 10% 변화할 때 법인세 비용 차감 전 순이익 변동폭이 지난해 말에는 1,510억원이었지만 올 9월에는 1,207억원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고 LG전자는 2,735억원에서 1,183억원으로 변동폭이 절반 이상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SK이노베이션과 삼성SDI는 환율의 영향력이 지난해 말에 비해 5분의1 이하로 뚝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환율 대응력이 떨어진 곳은 기아차(1,176억원→1,595억원)와 현대건설(1,368억원→1,466억원) 정도에 그쳤다.
이처럼 국내 수출 기업의 환율 방어능력이 높아진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금융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에서 단초를 찾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주요 기업들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적극적으로 해외 생산거점 구축에 나서면서 원화 강세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국내 생산보다 해외 생산이 많다 보니 원화가 아닌 현지 통화 결제비율이 60% 수준까지 올라섰다"며 "이에 따라 환율에 대한 민감도가 이전보다 많이 줄어든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결제 통화를 달러 외에 유로나 다른 이머징마켓 통화 등으로 다양화하다 보니 환율 변동에 따른 영향을 상쇄하는 효과를 얻었다"며 "플랫폼 통합률을 지난해 61%에서 올해 73%, 내년에는 90%까지 올리는 등 원가구조가 개선되고 있는 점도 충격을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등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확실한 제품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환율 충격을 줄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올 초 보고서를 통해 "기술, 품질, 브랜드 경쟁력 제고 등을 통한 비가격 경쟁력이 강화돼 수출 기업의 가격 전가능력이 개선된 것도 환율 민감도가 떨어지게 된 이유"라며 "이로 인해 금융위기 이전에는 원∙달러 환율이 1% 상승할 때 영업이익률이 0.148%포인트 상승하지만 금융위기 이후에는 영업이익률이 0.048%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환율 변동에 대비해 기업들이 헤지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환율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원은 지난해 수출 규모 1,000만달러 이상 기업 중 72%가 환 위험을 관리하는 등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경쟁력의 초점이 가격에서 기술력으로 넘어간 것도 환율 변동에 덜 민감해진 요인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서는 등 IT 분야에서 확실한 기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 때문에 환율이 제품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내다봤다. 김학균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경우 IT 분야에서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기술력과 품질을 보유하고 있다"며 "최근 삼성전자의 주가가 원∙달러 환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고가를 잇따라 경신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평가했다.